또 임신을 했구나/곽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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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임신을 했구나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곽예순
창문을 열면 베란다에서 날아온 꽃향기가 코끝을 살살 간지럽게 한다. 그윽한 향을 가슴에 담는다. 얼마 전부터 여러 종류의 풍란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아끼는 풍란이 있다.
4년 전 전주로 이삿짐을 꾸릴 때의 일이다. 32년 동안 살던 짐을 정리하는 게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집안일들을 남편과 상의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화분을 정리하는데 의견이 똑같을 수는 없었다. 상당히 오랜 기간 우리와 같이 한 화분이 있었다. 낮은 타원형의 화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인삼벤자민과 숯 위에 아주 작은 풍란을 심은 화분이 그것이었다. 그야말로 볼품이 없는 풍신 난 풍란이었다. 하나하나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이 풍란화분이 바깥주인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아무리 볼품이 없다 해도 처음으로 꽃대가 올라오는 화분을 그냥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임신한 꽃을 어떻게 버리고 가!”
나는 순간적으로 단호한 한마디를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남편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같이 전주까지 왔던 풍란이 올해도 묵묵히 꽃대를 준비하여 힘차게 올라오고 있었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한 꽃망울이 올라와 집주인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곁에서 붉게 웃으며 자태를 뽐내는 철쭉이나 동백꽃처럼은 아니지만 초록 잎새를 보면 나도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는다. 혹여나 다른 꽃들이 괄시하지 않을까 해서인지 해마다 꽃을 피운다.
화려한 외모보다는 은근한 정을 지닌 사람이 더 매력이 있듯이, 모양은 버려도 아까울 것 없는 화분이었다. 묵묵히 올라오는 꽃대는 분명 말을 했을 것이다. 꽃망울을 잉태하고 있는 나를 데려가 달라고. 제 할 일을 다 마친 뒤에는 홀가분해진 몸으로 더운 여름을 나고 추운 겨울에는 또다시 봄을 잉태할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눈빛만 보아도 서로를 알 수 있듯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사랑하는 사이다. 활짝 핀 얼굴로 서로 인사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나는 요즘 풍란에게 무척 애교를 부리며 대화를 나눈다.
"내가 너를 버리고 왔다면 이렇게 설레는 기다림을 어떻게 맛볼 수 있었겠니?"
(201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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