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했던 순간/이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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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했던 순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주간반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이 종 희
“아버님, 애비 수술해요!”
지난 화요일 아침을 먹은 뒤 며느리한테서 받은 전화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호들갑을 떤다고 할까봐 티를 내지 않고,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물어보았다. 어제 디스크 수술을 잘한다는 서울ㅇ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는데, 바로 수술手術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오늘 수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허리가 아파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 옆으로 기울게 걸었다.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하라고 일렀건만 회사가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此日彼日 미루어 왔었다. 일주일 전에 아들 집에서 잠을 자는데 아들이 밖으로 나갔다가 한참 후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3시쯤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내가 이유를 물으니 허리가 아파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왔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같으면 야단을 쳐주고 싶었지만 제 아들도 초등학교 2학년이나 되니 그럴 수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아들에게 전화를 하여 하루 빨리 병가를 내고 치료를 하라고 말했다. 아들은 이번 주에 회사 일을 정리하고 다음 주에 병가를 내고 입원하겠다고 하였다.
며느리 이야기를 들어보니 집 가까이에 있는 ㄱ대학교병원에 가서 진료診療를 받았는데 의사가 상태가 심하다는 말을 하지 않아 급하게 마음을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渦中에도 베트남 출장出張까지 계획하였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런데 회사 동료의 알선으로 ㅇ병원에 가서 업무과 직원의 도움으로 대기待機하지 않고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검사 결과를 알려준 의사는 내일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디스크가 터져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반신下半身이 마비痲痹될 수 있다는 소견所見을 말해 주어 수술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아찔한 일인가.
옆에서 전화내용을 듣던 아내는 왜 이름도 없는 병원으로 갔느냐며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다.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휴대폰을 주면서 며느리에게 전화해 보라고 했다. 내 휴대폰은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을 아들이 가족으로 묶어 주었다. 가족으로 묶으면 가족 간 통화는 웬만하면 요금이 없다. 이렇게 묶은 이유는 할애비와 손자 간에 언제든지 통화하기를 바라는 아들의 지혜였다. 내 휴대폰 통신요금도 아들이 내주고 있다. 아내는 며느리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에야 얼굴빛이 온화溫和해지는 것이었다. 한마디 하고 싶었으나 참는 것이 보약이라고 생각하고 말을 아꼈다.
언제고 꼭 해야 될 수술이고 병원선택도 잘 한 것 같았다. 나는 무슨 일이든지 아들이 하는 일을 믿는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매우 꼼꼼하고 빈틈없이 처리하기 때문이다. 해마다 한두 번은 콘도를 빌려 우리 가족들이 1박 2일 즐기곤 할 때도 아들이 모든 일을 추진한다. 콘도도 사둔 것은 없지만 역량力量을 발휘하여 우리 가족들이 지내기 편한 곳을 언제든지 빌려 이용한다. 내가 퇴직退職하면서 아들에게
“우리 가족들이 이용할 수 있는 콘도나 하나 살까?"
“살 필요 없어요. 우리 가족들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빌릴 수 있어요. 그리고 1년에 몇 차례나 이용한다고요.”
하면서 만류挽留하였다. 언제나 사치奢侈는 남의 집 잔치지 아들 내외는 정말로 검소儉素하게 생활하는 걸 보며 ‘요즘 젊은이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나 혼자 미소를 짓곤 한다.
얼른 병원에 가보고 싶었지만 부모님 산소에 가서 잡초雜草를 뽑고 제초제除草劑를 뿌리기로 계획되었던 터라 산소山所로 향하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는지 아내의 풀을 뽑는 손길이 날렵해 보였다. 나는 몇 년 전에 심은 배롱나무 가지를 큰 줄기만 남겨 놓고 지난해 자란 가지는 모두 잘라버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는 그렇게 자르니까 시원하다면서 좋아하였다. 나도 기분이 좋아 아들 병원에 갈 생각은 잠시 잊었다. 작업을 마치고 전주 호성동 농협 자재창고에 가서 가축분家畜糞 퇴비堆肥 10포를 사서 승용차에 실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서울에 가면 저녁식사가 늦을 것 같아 아내와 함께 보신탕을 사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저것 집안 정리를 하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4시 15분 서울행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는 직행直行버스를 자주 이용한다. 왜냐하면 소요시간은 고속버스나 같으면서 요금이 싸기 때문이다. 고속버스 우등은 17,900원, 일반은 12,200원이지만 직행버스는 11,000원이다. 그것도 아내와 나 둘의 요금을 합하면 손자들에게 사줄 과자 값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아들의 수술이 잘되고 쾌유快癒를 비는 뜻에서 묵주기도黙珠祈禱 10단을 바쳤다. 다른 때 같으면 40단은 바치는데 오전에 산소에서 일을 한 탓인지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가 없어 눈을 감고 말았다.
서울 남부터미널에 내려서 지하철地下鐵을 타고 둘째딸과 약속한 동서울로 갔다. 언제 가도 서울은 사람들로 홍수를 이룬다. 또한 젊은이들은 아이폰인지 스마트폰인지 하는 것들을 보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두뇌頭腦는 어디까지 발달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동서울 역에서 내려 둘째딸 가족을 만났다. 손자인 건우는 할애비를 뒷좌석 제 옆에 앉으라고 권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할애비인 나를 따르는 손자들이 있어 행복하다. 딸은 간호看護를 해야 할 우리와 제 오빠가 먹을 반찬 7~8가지며, 여러 날 먹을 수 있도록 많은 밥을 해가지고 왔다. 형제가 있으면 이렇게 좋은데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아기를 낳지 않으려 하니 국가적으로도 큰 문제다.
병실에 들어가니 조금 전에 회복실回復室에서 나왔다고 했다. 힘이 없는 눈으로 부모를 바라보는 아들이 안쓰러워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며느리는 수술이 잘되었다고 했다. 우리들의 기도를 주님께서 응답應答하신 것 같다. 아들은 밤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물 한 모금을 먹을 수 있었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 며느리를 집으로 보내고 나와 아내가 아들 간호를 맡았다. 불편한 병실이지만 아들을 간호하게 된 것이 행복했다. 만약 우리가 없었더라면 며느리는 회사에 출근도 못했을 것이다. 간호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자 침대를 나란히 놓고 우리 부부도 잠을 청하였다. 낮에 일한 것이 피곤하였는지 버스에서 잤건만 눕자마자 잠이 들어버렸다.
아들의 아침 식사는 흰죽이었다. 앉지도 못하고 반듯하게 서서 밥을 먹는 아들이 측은惻隱하게 보였다. 식사를 마친 뒤 나는 링거병을 들고 아들 뒤를 따라가면서 다리 운동을 시켰다. 이때만큼은 아들도 아기가 된 듯 어린양도 하였다. 점심에는 밥이 나왔다. 신장이 184㎝인 아들은 몇 끼니 안 먹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한 그릇을 잠깐 사이에 비워버렸다. 밥을 잘 먹는 아들을 보면서 걱정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나는 점심을 먹고 아들 집에 가서 학교에서 돌아온 손자를 데리고 왔다. 손자인 상완이도 함께 오면서 입을 한 시도 쉬지 않고 할애비에게 이야기를 거는 것이었다. 병원에 도착하여 부자 상봉相逢을 시켰다. 아들도 자식 사랑이 남달라 제 아들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니 흐뭇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눌러앉아 간호를 하고 싶었지만 아내에게 맡기고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한참을 자다보니 전주에 도착하였다. 오늘 아침 아들과 통화하면서
“아들아! 다음에는 병을 키우지 말고 제 때 병원에 가서 바로 치료하기 바란다. 회사일도 중요하지만 네가 건강해야 더 능률을 올릴 수 있지 않겠니?”
하고 당부當付하였더니 감동感動어린 목소리로 애비의 말을 받아들였다. 하반신 마비가 왔으면 어찌할 번했는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아들인데 정말로 아찔했던 일이다. 좋은 병원을 안내해준 직장동료와 ㅇ병원 업무과 직원, 무엇보다도 수술을 집도執刀한 의사선생님께 감사하기 짝이 없다. 또 이러한 과정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주님께도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2011.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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