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균 시인의 시비 앞에서/강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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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균 시인의 詩碑 앞에서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강 우 택
전주 덕진공원에는 몇 개의 詩碑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공원을 둘러보는 사람들 가운데 이 詩碑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 역시 그곳에 시비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관심 밖이었다. 어느 해 이른 봄, 공원 안의 긴 의자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나리꽃이 노랗게 피어있고 작은 대나무가 예쁘게 자란 한 시비 앞으로 무심코 발걸음을 옮겼다. 詩碑에 새겨진 시인 李轍均이란 이름! 한동안 나는 시선이 그곳에 고정된 채 가슴에서 고동치고 있었다. 어! 세상에 이런 일이.
*한낮에*
이철균
嶺 넘어 구름이 가고
먼 마을 호박잎에
지나가는 빗소리
나비는 빈 마당 한 구석
조으는 꽃에
이 시는 이철균 시인이 1953년 문예신춘 초하호(初夏號)에 실린 <한낮에>란 제목의 등단작품이다. 60여 성상(星霜)의 생애 중에 남긴 주옥같은 유시(遺詩)의 한 부분이다. 청소년기(靑少年期) 한 때 그 분과의 친교로 인한 갖가지 추억이 생생하게 뇌리를 스쳤다.
나와 이철균 선생과의 첫 만남은 전남 목포에서 시작되었다. 1950년 목포 유달산 기슭에는 아직 흰 눈이 녹지 않고 있을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남쪽 항구도시 목포에서 명문사립학교인 목포문태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일 때였으니 오래전의 일이다. 어느 추운 날 늦은 오후, 한 손에는 큰 가방을 들고 우리 집 마당에 서있는 낯선 손님이 있었다. 조금은 마른 체구에 안경 너머 눈초리가 매서운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나는 전주에서 온 사람인데 자네가 교장선생님의 아들인가?”
처음부터 반말로 인사를 건넸다.
“네 그렇긴 합니다만 누구신지요?”
나도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아버지는 지금의 목포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계실 때였다. 인기척을 느낀 어머니가 방에서 나오시며 반갑게 젊은 손님을 맞이하셨다.
“전주에서 오신 선생님이시군요?”
“얘야, 전주에서 오신 선생님이시다. 어서 인사드려라.”
어머니는 이미 알고 계신 듯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철규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날 밤 늦게 귀가하신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젊은이는 전주의 부챗집 부자의 아들인데 일제 말 일본의 명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다니는 중학교의 국어 선생님이 될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집에서 하숙을 하는데 내 방을 함께 쓰라고 하셨다. 동향인이 우리 학교의 선생님이 되고 말로만 듣던 명문대 출신과 한 방을 쓴다는 것이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잣집 아들이 하숙은 어떻게 할 것이며 또 선생님과 제자가 한 방을 쓴다는 것이 불편할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감도 있어서 참고 지내보기로 맘먹었다.
당시 이철균 선생님은 우리 집에서는 철균 선생으로 통하였다. 귀가 후 그는 독서(일본어) 삼매경에 빠지거나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 많았다. 하숙생활이 정착되면서 저녁식사를 한 뒤에는 반드시 산보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를 동반하는 것이 상례였다. 둘이서 걷는 산보 코스로는 지금의 유달산 노적봉 작은 봉우리에 있는 정자까지로, 왕복 1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지금도 목포를 찾는 관광객이면 곧잘 들르는 명소다. 당시는 빼곡이 들어선 골목안의 집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만이 지금의 가로등 구실을 하던 때였다. 일과처럼 된 산보는 요즘 군대의 야간 행군에 비견되어 날이 갈수록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혼자도 할 수 있는 산보를 공부하기에도 바쁜 나를 늘 동반하는 것에 거부감이 생겨 짜증마저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자인 나로서는 좋든 싫든 스승의 요청인 만큼 따르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후회도 해 본다.
밤의 유달산은 마치 어느 중세 유럽의 큰 성곽을 연상케 하였고, 초승달이나 그믐달이 산봉우리에 걸쳐있을 땐 신비스럽기까지 하였다. 철규 선생님은 산보 중에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기벽이 하나 있었다. 출발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혼자서 중얼거리는데 동행하는 나로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속으로는 이 선생님이 정신이 온전한 사람인가 하고 의아할 정도였다. 만일 이 선생님이 이상한 사람이라면 누가 이 사람을 선생님으로 모셔 오겠는가. 그럴 리는 없지, 하지만 나로서는 선생님의 그런 기벽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시상(詩想), 바로 그 시상을 떠올리게 하는 수단이었다.
집에 돌아온 철규 선생은 책상머리에 앉아 원고지에 뭔가를 쓰고 구겨버리고 또 쓰곤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구겨진 원고지가 한 뭉치씩이나 되었다. 그 무렵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려운 작업이란 것을 깨달았다. 딴 짓은 다 해도 시를 쓰는 일, 문학은 어려운 것이라고 판단, 일정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그 무렵 철균 선생님은 휴일이면 삼학도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바닷가 걷기를 좋아하셨다. 당시 그 곳에는 삼학사이다란 음료수 공장이 하나 있었다. 공장을 찾는 이들에게 무료로 음료수를 줘서 실컷 마시게 했다. 혀를 톡 쏘는 사이다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점심 때쯤 되면 선창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중국 요릿집에 들러 중국음식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음식 값은 물론 선생님이 내셨다.
요즘에 목포를 여행할 때 나를 실망시키는 것이 하나 있다. 그 옛날 목포의 명물 삼학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옛날 작은 섬인 삼학도는 헤엄쳐 오갈 수 있는 코앞의 섬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계절 푸른 숲이 우거져있는 아름다운 섬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섬은 육지와 맞닿아 황량하게 파 헤쳐져 공장부지로 변했으니 말이다. 아름답던 그곳은 이제 나에겐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철균 선생님과 나의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해 6월 6.25사변이 발발하였고 전세는 나날이 악화돼가고 있었다. 남단의 항구도시 목포도 적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도 시간문제란 소문이 떠돌던 때였다. 그해 7월초의 한여름이었다고 생각된다. 선생님과 나는 목포 시내에서 삼사십리 떨어진 바닷가의 어느 농촌을 방문하고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에 따라 한 농가에 들른 우리는 밤늦게 철로를 따라 시내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고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아름다운 여름밤으로 기억된다. 갑자기 시내 쪽에서 쿵쾅하는 폭음이 울리면서 빨간 불길이 하늘높이 치솟고 있었다. 치솟는 화염이 얼마나 맹렬한지 목포 유달산을 환하게 비출 정도였다.
뒤에 안 일이지만 당시 후퇴하던 국군이 목포까지 가져온 수많은 석유 드럼통을 하는 수 없이 폭파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우선 시내에 있는 집의 안위가 걱정되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한참 걷고 있을 때 나지막한 목소리로,나 이삼일 안으로 이곳 목포를 떠나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의외의 말씀에 놀란 나는 "? 목포를 떠나신다고요? 왜요?"했더니 전주 부모님의 안위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 때 나는 선생님과 헤어지게 된다는 것에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어린 나이지만 시국이 시국인 만큼 어찌 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섭섭한 심정을 가눌 수가 없었다. 이번에 헤어지면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그뒤 나도 고향인 전주로 돌아와 살게 되면서 간간히 선생님의 근황을 알게 되었는데 교편생활에 복귀하시어 생활하신다는 소식에 기뻐했던 일이 기억난다. 그러나 인연이란 예측키 어려운 것인가 보다. 한 번 찾아뵙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오랫동안 문안을 드리지 못하고 지내면서 세월은 기약 없이 흘러가고 말았다.
까마득히 잊어졌고 그리웠던 그 분, 이철균 시인의 詩碑 앞에서 나는 만감이 교차하여 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 詩碑 앞을 수없이 지나 다녔을 터이지만 무심결이라서 선생님을 인식치 못했던 나의 불찰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을 생전에 찾아뵙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뵐 수 있었더라면 선생님의 지나온 이야기나 나의 소년시절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詩碑 뒷면에는 목포 문태중학교 교사로 시작된 선생님의 약력이 새겨져있었다. 선생님은 그 옛날 목포문태중학교를 잊지 않고 계셨다. 그렇다면 당시 어린 소년인 나를 분명 기억하고 계셨을 것이다. 내 가슴은 감격으로 벅차 올랐다.
그렇다. 선생님은 오늘날 한국 문단의 거목으로 우뚝 서계시지 않은가! 그 옛날 詩文學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없었던들 有人 李轍均이란 이름을 어떻게 후세에 남길 수 있었겠는가. 나는 이 詩碑를 영원히 기억할 한 사람의 독자가 되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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