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지생활의 추억/전선숙
페이지 정보

본문
객지생활의 추억
전주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선숙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전주에서 객지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그해 2월쯤 버스를 타고 전주에 왔는데 함박눈이 소복히 내린 뒤였다. 버스가 전주시내에 접어들 때는 눈이 더 많이 내렸었다. 미끄러우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버스에서 내렸다. 어렸을 때 동네어귀에서 미끄럼을 타다 뒤로 벌렁 넘어져서 아찔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얼른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보는 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 뒤부터 빙판길을 걷는 일이 두렵다.
전주 변두리에 조그마한 방 한 칸을 얻어 봇짐을 풀어놓고 그때부터 나의 자취생활은 시작되었다. 언니와 나, 남동생 등 셋이 한 방에서 지내려니 비좁기 짝이 없었다. 책과 침구, 살림살이만으로도 방이 좁아 책상을 들여 놓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서 공부를 했었다.
저녁마다 천정에서는 찍찍, 우당탕 쥐들의 운동회가 열렸다. 쥐들이 오줌을 싸서 천정에는 지도가 그려졌는데 그 색깔과 무늬도 다양했다. 하지만 시골에서 유학 온 집은 오직 우리뿐이었으니 그것도 우리는 감사하게 생각했다. 다만 쥐들이 우리가 잠을 자는 방바닥에만 내려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천장에는 쥐들이 그리고 방에는 우리 남매가 살았으니 한 방에 두 식구들이 공존했던 셈이다.
먹을 것이라고 해봤자 김치와 된장국이 전부였다. 어쩌다가 멸치와 콩조림도 있었다. 시골살림에 유학생이 3남매나 되니 경비를 최대한 줄여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비를 아끼느라 캄캄한 새벽부터 일어나 연탄불에 겨우 밥만 해먹고 꺼지지 않을 정도로 구멍을 꼭 막고 일찍 집을 나서 등교를 해야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때로는 점심식사를 건너뛸 때도 있었다. 반찬이 없어서 도시락도 가지고 다니지 않을 때도 있었다. 간식은 사치스런 단어일 뿐이었다.
처음에는 집에 가고 싶어서 토요일만 되면 마음까지 우울해졌었다. 그때 동생은 나보다 더 어렸고 집에 계신 부모님도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생각하니 감히 내가 내려가겠노라고 말할 수 없어서 동생만 집에 보냈다. 1968년도이던가 현금 50원으로 시장에 가서 한물 간 고등어 한 마리를 사기도 했었다.
동생이 소풍간다고 후라이를 했는데 양을 늘리기 위해 밀가루도 섞어서 하다가 동생한테 잔소리도 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너무나 지독하게 아낀 것 같았다. 우리는 공부도 열심히 했었다. 내가 졸업할 무렵에는 아버지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 전주 병원에 오셨는데 얼굴은 창백하고 뼈만 앙상하셨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 무렵 동생은 전교 1등을 했기에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환한 웃음을 보이시며 기뻐하셨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장한 내 동생이 아버지께 효도를 한 번 제대로 했구나 싶었다. 우리는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압하고 공직에 취직을 했었고, 의사가 된 동생은 지금도 병원장으로 일하면서 아버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때 객지생활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얻은 게 많았다. 오늘날 내가 성실하고 알뜰하게 살아갈 수 있고 지금의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자취생활의 경험 덕이다.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 이전글완산칠봉/백인규 11.03.01
- 다음글어이할거나, 이 괴질을 11.02.2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