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아, 미안하다/정석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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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아, 미안하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석곤
어릴 때는 한복을 입고 자랐지만 한복을 입은 남자들을 보면 은근히 샘을 내며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다. 개량한복보다는 전통한복은 더 그렇다. 나는 벚꽃이 화사하게 핀 봄에 결혼을 했다. 그때 한복을 예복으로 준비하지 못한 아쉬움이 가슴 한 켠에 늘 남아있다.
작년 해넘이 달이 저물어가는 수요일 밤에 우리 교회의 당회가 있었다. 갑작스레 담임목사님께서 신년주일에는 교인들께 세배를 드리게 한복을 입고 오라고 하셨다. 새로 부임하셨기 때문에 목회 방향과 변화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모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에 오면서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아내에게 알렸다. 아내는 자다 말고 보자기에 싸여 양복장 안에서 해를 거듭 지내온 한복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손사래를 쳤다. 개량한복을 사기로 했다. 개량한복을 즐겨 입는 J권사님께 어디서 사는 것이 좋은지 알아보라고 했다.
이튿날 퇴근길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장에 왔으니 같이 집에 가자는 것이었다. 오면서 개량한복집에 들렀다. 꽤 넓은 매장에 남녀노소의 개량한복들이 제 멋을 뽐내며 패션쇼를 하고 있었다. 개량한복으로 단장한 젊은 여인이 안내한 2층엔 남자 한복들만 있었다. 몇몇 어르신들이 옷을 고르고 있었다. 나도 가장 멋진 옷을 골라 입어 보았다. 값이 제일 비싼 옷이다. 내가 아는 분은 옷을 입고계시다 나를 보고 좋다고 바꾸셨다. 다른 가게도 둘러보고 와서 사자며 그냥 나왔다.
그 다음날엔 살을 에는 매서운 추위가 몰려왔다. 아내와 저녁나절에 시내로 두세 가지 일을 보러 갔다. 일을 마치고 시장의 개량한복집을 찾아갔다. 남녀한복 네댓 벌이 걸려있어 눈에 차지도 않았다. 입어보라는 말에 마지못해 입었는데 하루 전에 입어 본 옷이 자꾸 눈에 어른거렸다. 값이 싸서인지 색깔이나 박음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들른 집으로 가자고 했다. 문득 겨울철 한복이라 한 해에 한두 번 입는데 비싼 옷을 살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맴돌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내 생각을 몇 번 되뇌었다. 물론 매사를 좋게만 생각하는 아내는 자주 입으면 되지 않느냐면서 이왕 값진 옷으로 장만하자고 우겨댔다.
급한 일로 며칠이 훌쩍 지나갔다. 아침부터 아내는 한복을 사러가자고 서둘렀다. 그런데 설거지를 마친 뒤에 한복을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연한 분홍 저고리와 바지, 짙은 자주 조끼와 마고자를 방바닥에 펼쳐 놓았다. 갑자기 입어보고 싶은 욕심이 앞섰다. 바지의 앞뒤도 없이 입고 허리띠를 마구 매어 보았다. 저고리와 조끼를 입었다. 그 위에 마고자도 입었다. 거울에 비친 내 옷맵시가 꽤 괜찮아 보였다. 저고리의 동정만 새로 달아 입어도 새 옷 같아 사지 않기로 했다. 바로 저고리와 바지 그리고 조끼를 가지고 집 옆 단골 세탁소로 갔다. 사장은 바지의 허리춤 바깥쪽 앞부분에 작은 옷핀을 꽂아주며, 조끼의 단추는 시내 한복집으로 가보라고 했다.
아내가 마을 가까이 있는 한복집들을 가보았지만 단추가 없어 중앙시장이나 남문시장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묵은해가 다 저무는 마지막 날이었다. 아내는 다시 한복을 펼쳐 놓고 조끼 위에다 마고자를 입으니까 조끼 색깔과 비슷한 단추를 달자는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집안에 있는 단추들을 총동원 사열을 시켰다. 그 가운데 다섯 개를 골랐다. 그런데 이게 웬일, 단추가 조끼의 주머니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세탁소에서 단추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아내가 돋보기를 쓰고 달았다. 이제 마치 설빔을 해놓고 설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 아이처럼 그 날이 기다려졌다.
드디어 새해 주일 아침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한복을 입었다. 먼저 바지를 입고 허리띠를 매는 데를 모른 채 질끈 졸라 맺다. 대님도 내 법대로 두 번 두르고 힘주어 쳤다. 다음은 저고리를 입고 옷고름도 서툴게 맸다. 조끼를 입고 단추를 끼웠다. 그 위에 마고자를 입고서 순금 한 냥 모양의 단추를 끼웠다. 그리고 팔방으로 돌려가며 거울을 보았다. 두루마기가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이것도 너무 고마웠다. 손발놀림을 비롯한 모든 활동이 자연스러웠다. 목사님의 깜빡 실수로 2부 예배 때 세배는 못 드렸지만 나 혼자 입은 것 마냥 뽐내느라 하루 내내 신명이 났었다.
내가 서른일곱 살 때 교회성가대에서 한 달쯤 성탄절 칸타타 연습을 했다. 발표 때 한복을 입기로 한 덕분에 좋은 것으로 한 벌 맞추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처음 입어본 한복이라 어떻게 입었는지, 느낌은 어떠했는지 가물가물했다. 성탄절 낮 예배순서에 따라 칸타타를 발표했다. 그때 흥겹게 찬양도 했지만 옷이 날개란 말이 있듯이 연습 때보다 훨씬 잘해 박수갈채를 많이 받았던 추억은 생생하다. 그 뒤로 그 한복은 보자기에 싸여져 양복장에서 강산이 세 번 변하려고 할 오늘까지 기다렸다.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하마터면 보자기에 싸인 채 내 명과 같이 할 뻔했는데 오늘은 한 나절을 활짝 웃는 것 같아 한복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나의 미안한 마음을 달랠 수 있어 좋았다. 내년 첫 주일에도 한복을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는 설에는 한복을 입고 설을 쇠어야겠다. 추석에도 날씨만 심술을 부리지 않으면 또 한복을 입을 거라고 니 짓;ㄴ과 약속을 해본다.
(2011. 1. 2.)
(주)․당회(堂會) : 장로교, 성결교 등에서 교회 안의 목사와 장로가 모이는 회의
․칸타타(cantata) : 17세기 초엽에서 18세기 중엽까지의 바로크시대에 가장 성 행했던 성악곡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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