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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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帽子)
김 학
문우들과 더불어 고창 선운사에 가기로 한 어느 가을날 아침, 뉴질랜드에서 산 벙거지를 쓰려고 했더니 아내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말렸다. 다시 꼭지가 달린 초록색 베레모를 썼더니 당신이 화가냐며 웃었다. 화가만 베레모를 쓰란 법이 있느냐고 투덜거리다가 결국 지난 주말 설악산기차여행을 다녀올 때 썼던 골프 모자를 골랐다.
택시를 탔다. 택시에 오르니 모자가 택시의 천장에 걸려서 슬며시 옆자리에 벗어놓았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택시비를 계산한 뒤 깜박 잊고 그냥 내려 버렸다. 먼저 도착한 문우들은 저마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때야 내 머리에 모자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 골프 모자를 산 것은 15년 전쯤의 일이다. 겨울에 골프를 치러 갈 때 자주 썼던 모자다. 빨간색 바탕에 검은색 줄이 그어진 멋진 모자였다. 날씨가 추운 날이면 귀를 덮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정년퇴직 이후 그 모자는 등산 혹은 야유회 때나 썼다. 나와 동고동락했던 그 모자는 지금 어떤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을까? 아니,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은 아닐까?
얼마 전 전주 경원동에 문을 연 모자박물관을 찾았다. 그 모자박물관은 학원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개관했는데 분위기가 좋아서 3층까지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주로 아름다운 여성 모자를 팔기도 하고, 모자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었다. 무려 3천여 개의 모자가 있다니 멋쟁이 여성이라면 꼭 한 번 찾아볼만한 곳이다. 영국에서는 해마다 로열 애스콧(Royal Ascot)이란 경마대회가 열린다. 경마경기지만 실은 화려한 사교모임이다. 영국 왕실이 후원하는 스포츠행사인 까닭이다. 여왕이 경마코스에서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참석자들은 독특한 모자와 긴 드레스를 입고 관전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다. 1711년 Anns Stuart여왕은 애스콧 경마장이 경주마가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여겨, 영국 왕실 주최로 경마대회를 연 것이 그 시초란다.
올해도 300년 전통을 이어받아 지난 6월 17일부터 나흘 동안 버커셔 애스콧에서 열렸다. 6월말에 열리는 유명한 윔불던 테니스대회와 템즈강에서 벌어지는 로얄 레가타(Henley Royal Regatta) 보트경기와 더불어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경마계와 사교계의 커다란 이벤트가 되고 있다. 그때는 마치 모자 자랑대회 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니 한 번 가보고 싶다.
나는 교황이나 추기경의 머리에 얹힌 멋진 모자가 부럽다. 나도 그런 모자를 써보고 싶다. 그러나 추기경이나 교황이 아닌 내가 그런 모자를 쓸 수는 없다. 나는 특수부대원들의 베레모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보병장교가 되는 바람에 그런 베레모를 쓸 기회도 없었다.
모자는 추위나 더위 또는 위험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고자 쓴다. 여성은 멋으로 모자를 쓰지만, 어떤 이들은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내세우려고 모자를 쓰기도 한다.
남자나 여자나 유난히 모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 어울리는 모자를 쓰면 확실히 품위가 있어 보인다. 더구나 여자는 때와 곳에 구애 받지 않고 늘 당당히 모자를 쓸 수가 있다. 그러나 남자는 실내에서는 모자를 벗어야 한다. 모자로만 따지자면 남성이 여성에 비해 심한 차별을 받는 편이다.
큰 외숙은 돌아가실 때까지 갓을 쓰셨다. 6‧25한국전쟁 무렵 큰 외숙은 군대에 갈 나이였다. 그런데도 검문하던 경찰은 갓을 쓴 큰 외숙을 검문조차 하지 않았다. 갓은 나이가 들어 보이게 하는 변장도구였던 셈이다. 큰 외숙은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공부하셨다. 우리 외가는 엄격한 유교집안이어서 일제 때 외숙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서당에서 한학(漢學)만을 가르쳤다. 나도 큰 외숙처럼 갓을 써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 번도 갓을 써보지 못한 채 내 나이는 어느새 고희의 문턱에 이르고 말았다.
모자는 용도에 따라 생김새도 가지가지다. 양복차림의 신사가 쓰는 중절모를 비롯하여 야구나 골프, 등산 등 운동을 할 때 쓰는 모자, 카우보이모자, 벙거지, 빵모자, 밀짚모자, 털모자, 방한모 등 그 종류와 모양도 다양하다. 또 공사장에서 쓰는 안전모, 오토바이를 탈 때 쓰는 헬멧, 전쟁터에서 쓰는 철모 등은 생명을 지켜주는 안전장구 역할까지 한다.
모자는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로마 교황의 삼중관(三重冠), 박물관에서 본 금빛 찬란한 신라왕관,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의 머리에 얹어주는 월계관은 얼마나 위엄이 있고 멋지던가.
대학졸업식 때의 사각모를 보면 눈물이 난다. 내 사각모를 벗어서 어머니에게 씌워드렸을 때 활짝 웃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그 순간 만감이 교차하셨을 것이다. 사각모를 쓴 자식을 보며 대학졸업까지 뒷바라지를 하느라 허리가 휘던 사연들이 줄줄이 연상되었을 것이다. 헌신적인 어머니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나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왜 그런지 나는 모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모자를 좋아하기는 한데 모자를 쓰고 거울을 보면 영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모자에 어울리도록 내 얼굴을 고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모자 디자이너에게 내게 잘 어울릴 모자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특별주문이라도 해볼까? 모자가 잘 어울리는 사람을 보면 늘 부럽다. 모자의 모양은 나라에 따라,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수준에 따라, 취향에 따라 변한다. 나도 멋진 모자를 써보고 싶다.
(2010.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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