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언덕에 서서/박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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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언덕에 서서
전주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박 병 욱
퇴직하여 5년을 넘기기 힘들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같이 근무하다 나보다 10여 년 전에 먼저 퇴직한 동료 한 분은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다. 하릴없는 실업자로 그 시간을 버틴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이리라.
자연계열을 전공했던 나는 S방송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악성 디스크로 사표를 내고 몇 년간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한 뒤, 사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를 했다. 그러다 2006년 2월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
퇴임 직전 개인적인 사정으로 퇴직연금 문제를 고민하면서 행정주임과 상담을 했더니, 기본단위 20개월로 책정된 연금 액수만 알려주면서 그 이상은 모른다고 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21~25개월에 해당되는 연금이었기에, 서울 사립학교연금관리공단에 전화를 걸어 구체적인 상담을 시도했으나 해당직원은 개인정보라서 자세히 알려 줄 수 없다면서 행정주임을 바꾸어 달라고 했다. 상담자가 본인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행정주임이 본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퇴직 당사자인 본인에게도 알려 줄 수 없는 정보라니 이것은 분명 직무유기였다. 앞으로 내 사활이 걸린 문제인데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두말없이 전주사립학교연금관리공단으로 달려가니 담당 여직원은 친절히 맞아 주었다. 찾아온 용건을 말하고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했다.
“개인정보이니 그렇기는 하지만 본인의 요청에도 그랬다니 너무했네요.”
그러면서 신분증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연금액수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25개월분 연금을 선택하여 수속을 마친 뒤 사회초년생으로 등록했다.
공직생활에서야 5년이 아니라 3~40년도 금방 지나간다. 퇴직 전 사회적응 예비교육을 2~3일 받으면서도 그냥 적당히 지낼 수 있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퇴직하여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먼저 소일거리 프로그램을 짰다. 그러면서 여기저기 다니며 사회에 적응하는 훈련이 시작되었다. 모르긴 해도 이 기간이 5년은 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 한 달 뒤 나온 첫 연금을 생활비로 충당하고 보니 금싸라기 같은 돈이구나 싶었다. 이러면서 나의 사회생활은 차츰 안정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고 보니 금년이 퇴직 5년째다. 이만하면 나의 사회생활 기반은 닦인 셈이다. 차츰 여유를 즐기다보니 여행을 다니거나 어떤 모임에 나가도 끼리끼리 어울린다. 같은 길을 걸어 온 분들이니 서로 통하는 게 많다. 대화도 통하고 분수도 잘 맞는다. 대체로 일반직 국가공무원이나 교직원출신들은 어디를 가나 항상 여유롭고 자유 분망하다. 왜 그럴까. 이는 매달 지정한 날짜에 꼬박꼬박 받는 연금이 있어서 가능할 것이다. 직장근무를 하면서 저축하는 셈치고 매달 넣었다가 받는 내 돈이다. 하지만 이자까지 붙어 나오는 것이니 기존 봉급보다야 액수는 적어도 월급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으로 어디 가서 필요한 것도 사고 큰 불편 없이 살기는 하지만,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가 필요하다. 연금관리공단이 있어 경제적 뒷받침을 해 주기에, 이런 고마운 혜택도 누리며 근심걱정이 없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다른 계층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기도 만만치 않고 분위기도 어색하다. 전에 근무했던 방송국 사원들은 퇴직일시금이 많은데다 언론계 출신이라는 위세 때문에 퇴임 초에는 제법 으쓱거리고 다닌다.
하지만 명색이 기술국 간부로 퇴직한 그 당시 내 동기들을 근래에 만나보니 풀이 죽어 있었다. 그네들은 공무원연금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요즘처럼 고물가시대에는 한 층 더 그럴 수밖에 없다. 눈요기만 하려도 돈, 한 발자국만 옮겨도 돈인 세상이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원래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돈이 말을 하지 않던가. 해결의 실마리는 바로 연금이 쥐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소일삼아 가벼운 운동도 하고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하러 다닌다. 시간이 많아 그만큼 다양한 여가를 즐기는 편이다. 그러나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다보니 어떤 때는 지루하기도 하여 지금은 글도 쓴다. 한 편의 글을 쓰다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니 이만한 소일거리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글눈이 어둡고 글 길이 짧고 좁다보니 자연히 문학동아리를 드나들며 열심히 공부한다. 덕분에 글눈도 깨우치고 많은 글 친구들이 생겨 새로운 벗들과 어울리게 되어 일거양득이다. 술 한 잔에 얼큰한 기분과 함께 주고받는 대화 속에, 늦둥이 친구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저 좋기만 하다. 이 모두가 다 연금의 덕택이다.
이제 생의 종착역에서 숨 가쁘게 달려 온 옛 추억을 더듬으며, 삶의 그늘에 가렸던 오솔길을 한껏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해는 어느덧 땅거미와 함께 저문다. 젊은 날의 연애시절도 그리며 만년지기 아내와 함께 두 손을 꼭 잡고 동편의 달이 비추는 호숫가를 거니는데……. 저 멀리 잔잔한 호수에 일렁이는‘황혼의 언덕’이 달빛에 젖어 잔영으로 밀려오며 나를 맞는다.
(2011.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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