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이, 스톱/장지연
페이지 정보

본문
오라이, 스톱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장지연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친구들과 개천예술제가 열리는 진주에 가려고 아침부터 버스를 기다렸지만 이미 만원버스라 세워주지도 않았다. 다음날 먼동이 틀 즈음 친구와 셋이서 3십 리 길을 나섰다. 강을 건너고, 벼이삭이 누렇게 물든 벌판을 지나,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 진주에 도착했다.
책속에서만 보던 촉석루에서 은비늘이 반짝이는 남강을 내려다보니 논개 바위가 오뚝이마냥 앉아 있었다. 우린 쪼르르 달려가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도시락을 펼쳤다. 첫술은 논개 먹으라며 밥 한 술과 멸치 한 마리를 ‘툭’ 던지니 강물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춤을 추었다.
우리는 빈 도시락을 허리에 불끈 매고 인파속에 휩쓸러 구경 길에 나섰다. 자동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채 눈에 불을 켜고 빵빵거렸다. 높은 건물과 차도 사람도 많은 걸 보니 진주가 엄청 큰 곳 같았다. 남강 다리에 올라서니 강바람을 타고 오빠가 즐겨 부르던 ‘진주라 천릿길을 내 어이 왔던가.’ 라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북소리와 어우러진 함성소리를 따라 달려가니 모래사장에선 소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소 두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다가, 뿔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사금파리 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소 주인들의 눈에 불이 퉁겼다.
“할애비처럼 살기 싫지! 애비처럼 살기 싫지! 이겨! 이기기만 하면 황제처럼 살 수 있어!”
주인 말을 알아들었는지 혀를 축 늘어트린 채 가쁜 숨을 내쉬며 물러서지 않는 소, 다른 한 마리가 등을 돌릴 때까지 혈투를 벌이는데 내 손에 땀이 흥건히 배었다. 어떤 소는 상대소와의 눈싸움에 밀려서 도망치는 바람에 판정패를 당했다.
우리도 싸울 때 눈싸움을 하는데 끝까지 째려보는 사람이 이긴다. 그런데 소도 눈싸움을 하는 걸 보니 사람과 함께 살면서 배웠나보다. 소싸움이 끝나자 해가 서산에 기울어져 친구들과 버스 터미널로 뛰어가 꼬불꼬불 끝이 안 보이게 늘어선 줄의 꼬랑지를 붙잡았다. 다리는 아팠지만 줄만 서면 차를 타게 된다는 말에, 기분은 둥실둥실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두 시간쯤 기다린 끝에 난생 처음 버스를 탔다. 차안에는 찢어진 비닐커버를 둘러 쓴 의자가 줄지어 있고, 군데군데 손잡이 끈이 달려있어서 깨금발을 하고 손을 펼쳐보았지만 높아서 잡을 수가 없었다.
작은 키가 미워서 입을 삐죽 내밀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니, 차표를 세던 차장언니가 나를 힐끗 쳐다봤다. ‘내리라면 어떡하지?’ 더럭 겁이 났다. 동생 주려고 산 왕사탕을 만지작거리다가 슬그머니 내밀었다. 차장 언니가 씽긋 웃으며 내 걱정을 덜어주었다. 6학년이 되었다. 은행잎이 노란 옷을 입고 비틀비틀 춤추며 은행나무 곁을 떠날 때, 우리들은 졸업을 앞두고 해인사로 수학여행을 갔다. 선생님과 함께 관광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타니 너무 기뻐 가슴이 콩닥콩닥 다듬이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검정 옷에 하얀 스카프를 두른 차장언니가 “오라이!” 하니 차가 출발하였다. 덜커덩덜커덩 자갈길을 지나 미끄러질 듯 시멘트 길을 달리더니, 세 시간여 만에 해인사 입구에 들어섰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숲 터널을 이루고, 개울물이 합창을 하는 계곡을 꼬불꼬불 따라가니 해인사가 얌전하게 앉아 풍경소리를 연주하고 있었다.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하나이며, 부처님의 말씀인 팔만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 절이었다. 티끌하나 없는 경내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다시 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운 눈으로 차장언니를 바라보았다. '옳지! 나도 차장이 되어야지, 그럼 이곳에 올 수도 있고, 서울로 ‘오라이’ 하면 서울로 갈 것이고, 대전, 부산, 그리고 평양까지도 내 말 한마디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니 뛸 듯이 기뻤다.
돌아오는 길에 차장언니 말 한마디에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운전사가 머슴 같아 보였다. '나도 빨리 커서 차장이 되어야지,' 졸업여행이 준 꿈을 안고 집에 돌아와서 “오라이” “스톱” “뒤로 빠꾸” 연거푸 큰소리로 외쳤다. 식구들이 모두 나와서 “니 와그라노? 그게 무신 소린데?”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난 커서 차장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희망을 외치고 나니 꿈이 반쯤 이루어진 것 같았다.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마당을 빙빙 돌다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눈을 껌벅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럴 땐 “오라이?” 아니 “스톱!” 초롱이 별들이 납작 엎드렸다.
‘꿈’,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어느 날 문득 유년 시절의 꿈이었던 차장이 된 나를 찾았다. 살다보니 삶이 녹록치만은 않았지만 멈출 곳, 가야할 곳, 되돌릴 수 있는 길을 속도를 조절해 가면서 차장의 길을 가고 있다. 때론 남들이 가지 않는 길도 삐뚤빼뚤 거리며 무사히 이곳까지 왔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오라이’와 ‘스톱’을 외치며 우리 집에서 안전하게 차장의 임무를 다하려고 한다.
(2011. 8. 18.)
- 이전글세월은 흘러도 후유증은 남아/김현준 11.08.21
- 다음글왕따와 소안/박병욱 11.08.1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