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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흘러도 후유증은 남아/김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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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509회 작성일 11-08-2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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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흘러도 후유증은 남아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현 준 비가 몰려오려면 어깨가 욱신거리고 허리가 쑤신다. 노인들은 신경통이 기상예보나 다름없다. 아마 습도와 기온의 변화에 따른 체내의 감응능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마가 오래 지속된다. 장마전선이 제주도로 내려갔다가 다시 중부지방까지 올라간다. 그러기를 거듭 반복한다. 내 허리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벌써 40년이 더 된 일이다. 그때 그런 일만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1970년 학훈장교(ROTC)로 임관하여 강원도 양구 북방 중동부전선에서 근무했다. 휴전선철책 경계임무를 마치고 가을이 되어 작업부대로 내려왔다. 탱크 진입로를 감제할 수 있는 곳에 시멘트 전투 벙커를 짓는 작업을 눈이 내릴 때까지 계속했다. 보병사단은 '애 낳는 일을 빼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한다.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은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벙커 모양이 갖춰졌다. 나는 항상 앞장서서 땅을 파고 시멘트를 비볐다. 그런 모습을 보고 대대장 유 중령은 귀한 외제담배를 주기도 하였다. 사단장이 직접 공병대장을 대동하고 부대공사 검열을 나왔다. 3대대는 선임 9중대 지역을 먼저 점검하게 되었다. 나는 9중대 2소대장으로 시범벙커 작업을 지휘하였는데, 검열단은 벙커의 견고성, 정확성, 작전성 등을 점검하였다. 나의 소대 구역은 모두 통과되었다. 그뒤 대대장의 지시로 나는 대대 상황판을 들고 검열단을 수행하게 되었다. 몇 고개를 넘으며 그날 대대지역 검열을 모두 마쳤다. 검열단이 부대를 떠나게 될 때 중대장과 나는 터덕터덕 산을 내려와야 했다. 마침 공병대장의 찦차에 자리가 있어 대대장의 지시로 중대장과 나는 그 차를 타고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군용 찦차는 계급이 높은 사람이 좋은 차를 탔다. 계급이 낮을수록 낡은 차가 배정되었다. 공병대장은 계급이 소령으로 검열단원 중 하급자였고 낡은 찦차를 타고 다녔는데, 아무 생각 없이 그 차를 탑승한 게 잘못이었다. 산비탈을 가까스로 깎아 만든 작전도로는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차가 고물인데다 도로마저 경사가 심한 산악지형, 초겨울 좋지 않은 날씨로 악재만 쌓였다. 사단장 경호 차량을 선두로 사단장차, 연대장, 대대장, 그리고 공병대장의 차가 뒤를 따랐다. 산 정상에서 출발하여 8부 능선 쯤 내려왔을까 내가 타고 있던 공병대장 찦차의 브레이크가 파열되었다. 순간적으로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는 쏜살 같이 내려갔다. 앞 차들과의 연쇄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 순간 차는 오른쪽 벼랑으로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운전병이 대형 참사를 막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 본능적으로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꺾어버린 것이다. 찦차는 뚜껑을 벗긴 무개차였다. 왼쪽의 운전병과 중대장은 경상을 입었고 오른쪽에 앉은 나와 공병대장은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인생은 자리 값이 7할이라더니, 그때는 9할이 넘었다. "웽―"하는 사이렌 소리에 나는 정신이 들었다. 여기가 천국인지, 지옥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죽는단 말이냐?"고 소리친 것 같다. "김 소위, 살았소!" 누군가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누구요? 여기가 어디요?" 묻는 말이 모두 외침이 되었다. "나는 사단 헌병대 박 중위요.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이오." 그러고 나는 또 정신을 잃은 것 같다. 사단장을 경호차가 제일 부상이 심한 나를 태우고 가장 가까운 군단병원으로 후송하는 참이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야전병원에서 X레이를 찍는 중이었다. 몸이 산산조각이 난 것 같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입었던 군복 윗도리 뒷부분은 거의 다 뭉개져 없어졌다. 군단 이동병원(매쉬)에서 응급조치를 받고 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철모를 썼던 것이 천행이었다. 목숨은 부지했으니까. 운전병이 군 검찰부의 조사를 받았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나는 유선으로 피해자 진술을 하였다. 이후 나머지 군 복무기간을 힘들게 마치고 제대를 하였다. 집에 돌아오면 좋은 치료를 받아 깨끗하게 나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생활전선에 뛰어들고 차일피일 미루면서 사고 후유증은 평생 남게 되었다. 얼마 전 국가보훈처에 장애자 지정 등 방법이 없을까 하여 민원을 내보았다. 그랬더니 처음 진료를 받았던 군단병원이 소양강 댐 공사로 수몰되면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2차 진료기관에도 내용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우리는 어디 마땅히 핑계댈 곳이 없으면 운명이라고 체념하곤 한다. 나에게 있어서 군에서의 찦차 전복사고는 바로 나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2011.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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