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우물쭈물하다가/이신구
페이지 정보

본문
아, 우물쭈물하다가
전주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 창작반 석하 이신구
시내버스를 타러 가는데 아랫도리(下衣)가 실종된 늘씬한 아가씨가 지나가다 말고, 자꾸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주책없이 너무 만끽했나 싶어 가슴이 찔끔했다. 옛날에도 그런 일이 가끔 있었지만 그저 기분이 좋아 모른 척 지나친 일이 많았다. 그런데 어찌 요즘엔 가슴도 두근거리지 않고 이상한 생각이 든다. 거울을 보니 입가에서 볼까지 김치 국물이 묻어있지 않은가.
오늘이 정기 진료일이라 병원에 가려고 버스에 올랐는데 유달리 만원이었다. 전엔 고뿔 한 번 안 걸리고 지냈는데 요즘엔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게 되었다. 병원이 너무 많이 생긴 탓일까? 별것이 아닌데도 병원을 자주 찾으니 몸에도 이상이 생기는 게 아닐까? 버스 속에서 손잡이를 꽉 잡고 있는데도 차가 움직이면 몸이 기울고, 흔들렸다. 그전엔 안 잡고도 잘 버텼는데, 요즘엔 버스가 더 흔들리거나 기사가 급정거를 잘 하나 보다.
좌석엔 미래의 경로와 임산부인 청소년들이 다 차지하고 앉아서 깔깔대며 노인이나 임산부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늙은이도 젊은이에게 갖추어야 할 예절이 있다니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양보할 기색이 없어 보여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불쾌하였다.
버스가 출발하자 다리가 휘청하였다. 음악이 없어도 디스코나 막춤이 절로 추어졌다. 허긴 옛날 관광버스 안에서 수없이 연습한 것들이지만.
창밖을 보니 수많은 간판이 국적도 모르는 외래어로 채워져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내가 외국에 왔나, 여기가 우리나라인가 의심이 들 정도다. 아내의 화장품은 분명히 한국산인데도 잘 보이지 않는 잔글씨로 영어인가, 프랑스어인가로 되어 있다. 한글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었다. 나도 십여 년 간 외국어를 공부했는데 아무 쓸모도 없었다. 아내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그렇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을까?
버스에서 내려 큰길로 나왔다. 요즘엔 내가 알아보는 사람은 줄고,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는 것 같다. 기댈 선배는 줄고 나도 잘 모르는 후배들의 인사를 가끔 받는다. 나의 대화상대도 거의 다 연로한 분들이다. 나도 노인이 되었단 말인가?
귀여운 아기를 안고 가는 아낙의 어깨너머로 방실대는 아기들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다. 그전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따라가며 어르는 나를 뒤 돌아보던 아낙이 깜짝 반가와 한다. 어릴 적 고향동네 순이였다.
“오빠!”
반갑기 그지없는데, 그 순진하고 귀여웠던 순이 얼굴도 어느새 늙어보였다.
“너 순이 아니냐? 얼굴이 왜 그러냐?”
“오빠, 무슨 말씀을……”
금세 토라진다.
‘글쎄, 그때 놀러 다니던 고향의 그 뒷산은 그때보다도 더 푸르른데…….’
한두 달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타다 먹는다. 예약을 해도 30-40분을 기다려야 2-3분 진찰을 받는 지루한 날이다. 병원일이 끝나고 약도 탔으니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이다. 횡단보도를 지난다. 마음은 바쁜데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빨리 꺼지는 신호등을 탓하는 나를 보고, 지나는 사람들이 이상한 듯 쳐다본다.
가슴을 확 펴고 걷는 나더러, 어깨를 좀 확 펴고 걸으라고 한다. 내 모습도 잘 못 보는 아내의 눈도 낡아가는가 보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할 땐 아주 고왔던 아내 얼굴이 요즘 폭삭 쭈그러들고 있다. 나에게 잔소릴 많이 해서 그런가 보다. 老人은 행동(行動)을 느리게 하되 행실(行實)은 신중(愼重)하게 해야 한다고 변명을 했다. 식사시간, 먹고 싶은 것은 많은데 입속에서만 우물우물한다. 老人은 먹는 것으로 산다는데, 가려서 잘 먹어야겠다.
슈퍼에 들러 한 달 먹고도 남을 쌀을 샀다. 요즘 쌀은 더 무거워졌나? 20kg을 번쩍 들었더니, 팔과 어깨가 아프고 저리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40kg도 번쩍 들고 다녔는데……. 2층까지 어깨에 메고 걸어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아파트 계단을 오르니 무릎이 아프다. 십여년 전까지는 5층이었던 우리 집 계단을 날마다 걸어서 오르내렸는데 어째 이상하다.
시간이 남아 친구들이 잘 모이는 곳으로 찾아갔다. 한 켠에서는 바둑을 두고, 그 옆에서 시국한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엊그제 학창시절의 친구를 만났던 이야기를 꺼냈는데, 통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거시기……” “아 그 친구 별명이 ’아랫도리 털났어(아리스토 텔레스)였잖아!” “아, 그래. 그 친구 이름이……, 거시기 누구던가?”
서로 얼굴만 보며 ‘거시기’ 만 되뇌다 말았다. 친구들 모두가 누구인 줄은 알았으니 이름은 며칠 후에 생각나겠지. 옆에서는 젊은이들이 TV오락프로를 보는데 흘끗 눈을 돌렸더니 억지로 웃기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래도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깔깔대며 웃는다. 내가 나이 탓 인가?
쓸데없는 시국담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끼어들어, 언성을 높여가며 내 이야기를 앞세웠다. 서로 자기 말을 먼저 하려고 시끄러웠다. 바둑이고 뭐고 엉망이 되었다.
"어? 우리가 왜이래? 통제 불능이고 자제 불능이구만."
노인은 말은 줄이고, 목소리는 낮추라고 했는데……. 뚝딱하면 ‘그깟 놈의 것, 왕년에는 ……’ 하며 자기자랑을 앞세우려 한다. 그러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어처구니없어 헛웃음으로 끝난다.
오늘 나들이도 끝났다.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으려 한 발을 들고 바짓가랑이를 끼려니 삐그덕삐그떡 넘어지려 한다. 중심이 잘 안 잡힌다.
몸과 마음의 중심이 흩어져 몸도 대화도 감정의 통제불능이 오는 것 같다.
‘老人의 마지막 道’라는 손과 마음에 잡고 있던 것들을 언제 놓아야할지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할 때인 것 같다. '아, 나도 우물우물하다가 이렇게 되는구나 …….'
物物盡如此(물물진여차) 세상일이란 모두 이런 거야.
獨笑無人知(독소무인지) 나 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을 걸.
정약용의 詩 독소(獨笑-나 홀로 웃는 까닭) 한 구절이 생각난다.
- 이전글2100년 전 완주사람들/김길남 11.07.09
- 다음글弔蠅/정장영 11.07.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