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 한 개/김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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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 한 개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길남
단돈 1원이 아까운 때였다.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는 모두 어려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굶어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야했다. 농촌에서는 농사일밖에 무슨 할 일이 있었을까. 조금씩 짓는 농사라 거두는 것이 적어 양식으로도 부족했다. 지금 같이 비료를 주면 좋지만 귀하고 비싸서 비료를 쓸 수도 없었다. 돈이 될 만한 것은 쌀을 내는 일인데 부잣집을 제외하고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어려운 가운데 어머님의 결단으로 중학교에 들어갔다. 나보다 낫게 사는 집 아이들도 밟아보지 못한 곳이었다. 처음에는 12km가 넘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버스는 다니지 않고 기차도 없었는데 2학년 때에야 통학열차가 다녔다. 걷는 거리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먼 거리를 걸어야 했다. 무명으로 만든 옷을 입고 다닥다닥 기운 운동화를 신고 걸었다. 가방이 없어 책 몇 권을 책보에 싸서 메었다. 책보 끝을 길게 묶어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연필은 잘 써지지 않아 끝에 침을 묻혀 써야했고, 공책은 갱지로 만들어 누렇고 보잘 것 없었지만 과목만큼 갖추지도 못했다.
집에 돈이 없는 사정을 뻔히 알면서 학용품 값을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며칠을 망설이다 공책 걱정을 했더니 어머니께서 달걀 한 개를 주면서 시장에서 팔아 사라고 하셨다. 여러 개 같으면 짚으로 꾸러미를 만들어 들고 가겠지만 한 개뿐이니 오른쪽 호주머니에 넣고 갈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 부딪히면 깨지므로 조심조심하며 익산시장에 다다랐다. 그런데 달걀 사는 집에 가서 꺼내보니 그만 깨져버렸다. 어디에 부딪혔던 모양이다. 얼마나 아깝던지……. 공책 한 권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60년이 지났지만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이런 어려움을 겪으며 학교에 다녔다. 어려움을 맛보았기에 내게는 무엇이든지 아끼는 마음이 있다. 내 것이 아니라고 함부로 쓰는 사람을 보면 미운 마음이 든다. 목욕탕에서 물을 헤프게 쓰는 것을 보면 아깝다. 약수터의 수도꼭지에서 쓸데없이 물이 나오면 잠그기도 한다. 음식점에서 이미 나와 있는 반찬으로도 충분한데 더 달라고 하여 남기는 것을 보면 불쾌한 마음이 든다. 저 사람은 한국전쟁을 겪어보지 않아 배고픔을 모르니까 그러겠지 한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경제를 개발한 덕으로 지금은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2010년도 무역량은 7위라 한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일자리가 없다고 하지만 3D업종은 사람이 부족하여 외국인을 데려다 쓰는 실정이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찾아다닌다면 일할 곳은 많을 것 같다.
옛날에는 왜 그렇게 일자리가 없었을까.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민생을 제대로 챙기지 않아서 그랬을 게다. 높은 자리에 앉아 제 배만 채우려 하고 서민들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의 침탈이 심한 뒤라지만 정신을 제대로 챙기고 정치를 했다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게다. 세종대왕과 정조임금 같은 분이 계속 나오고 맹사성처럼 청렴한 재상이 많았더라면 우리나라는 훨씬 더 잘사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요즘에 태어난 아이들이 부럽다. 넉넉한 살림에 왕자나 공주처럼 사는 것을 보면 행복한 아이들이라는 것을 느낀다. ‘나도 요즘에 태어났더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렇다면 하고 싶은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인류를 위해 공훈을 남기고 싶다. 내 이름 석 자를 영원히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달걀 한 개를 깨트리고 애달파하는 일은 없을 게 아닌가.
( 2011. 4.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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