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면 생각나는 소년/정장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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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면 생각나는 소년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정장영
4월이 되면 그 많은 민주열사 가운데 이웃동네 시골소년 김주열이 떠오른다. 1948년 민주정부가 수립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정치체제만 갖추었지 민주화가 요원했던 시기였다. 자유당은 정권연장에 골몰하다 행정과 경찰권을 남용하여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군복무를 마치고 젊은 초년교사로서 고향학교의 졸업반을 담임하고 있을 때였다. 교과서내용에 따라 선거의 4대원칙인 직접, 보통, 평등, 비밀선거를 지도해야 했다. 어린이들이었지만 투표일이 지난 뒤 부모님들께서 하신 며칠 전의 선거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는 항의를 받은 바 있었다.
공무원선거중립이란 있을 수 없었고 선거운동기간에는 한 마을을 면사무소와 지서, 학교 직원 3인이 담당하였었다. 명분은 선거계도였지만 실은 주민동향파악이었다. 날마다 주민성향을 호별로 ○.X.△로 분석하여 보고해야했다. 정부기관지인 서울신문 이외 야당지인 동아일보, ……. 등을 구독했다면 불순반대자(야당으로)로 낙인찍힌 판이었으니 해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자유당 입당을 권하기도 했었다.
부정의 동기는 자유당이 십여 년간 집권을 했지만 당시 정‧부통령제 아래 80넘은 고령의 이승만 대통령이 만약의 유고시 후계자가 될 부통령, 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 씨보다 자유당 이기붕 씨를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였다.
3‧15.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이 당선되었으나 선거부정시비에 휘말려 항의시위가 계속되었다. 지방도시 각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은 불법선거 및 자유당과 경찰의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때 마산에서의 시위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4월 15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는 학생들을 더욱 격노하게 했다. 이때 마산 앞바다에서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 군의 시체가 떠올라 커다란 시위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년 열사 김주열은 1944년 10월 7일 전북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 93번지에서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김영용으로 1956년 금지면의 옹정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금지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금지중학교를 다니면서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며 학업에 정진하였다. 1960년 김주열은 어머니의 권유로 마산상고에 진학하였는데, 그해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대에 동참하였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아 열일곱 살이란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4월 11일,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에서 한 낚시꾼에 의해 인양된 김주열의 주검은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이 눈에서 뒤통수까지 박힌 채 바다에 버려졌다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연합통신 기자에 의해 보도되자 마산에서 다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김주열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최루탄은 미제 고성능 원거리 최루탄으로 무장폭도용 최루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거의 학생으로 구성된 비무장 시위 군중에게 이와 같은 최루탄을 발사했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만행이었다. 이어서 부정선거 규탄 데모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이어져 4월 혁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김주열의 죽음은 4·19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으나 그의 죽음은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그의 묘소는 오랜 세월 재야인사와 학생들에 의해 가꾸어져 왔었다. 그러던 중 1995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김주열은 소년 열사로 역사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고, 3월 30일 그의 묘역을 단장하고 추모각도 세웠다.
김주열 소년, 그 첫 민주열사가 다시 생각난다. 꽃을 미쳐 피워 보지도 못하고 간 넋을 달래고 싶다. 살아 있었다면 이제 60을 넘어 70을 바라보는 인생! 민주화를 위해 김주열의 뒤를 이어 박종철, 강경대, 이한열, 정상순,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박창수, 이정순 등 많은 열사가 불행의 길을 걸어야 했다. 앞으로는 이러한 열사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며칠 뒤의 민심의 큰 변혁을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시위가 확산되자 공무원을 동원하여 서울에 유학 중인 자녀들을 귀향시키라는 지시가 있어서 학부형들을 설득하러 부락출장까지 다녀왔다.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기성세대가 좀더 잘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민심은 천심’이라 했던가. 오직 하나님만이 역사의 진운을 알고 계시려니 싶다.
(2011.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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