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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조선왕조의 발상지/이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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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583회 작성일 11-03-1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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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이 종 희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창업創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本鄕 전주의 역사를 답사踏査하고자 오후 2시에 경기전慶基殿으로 나갔다.‘전주문화사랑회와 함께하는 전주재발견 현장답사'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전주에서 50여 년간 살면서 경기전을 몇 번 둘러보았지만 깊은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문외한門外漢이었다. 약속시간이 되니 학예연구사가 자료를 나눠주는데 초등학생부터 80대 노인들까지 참가자들이 다양하였다. 날씨도 화창하여 답사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바로 이어서 전주역사박물관 이동희 관장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우리는 경기전 하마비下馬碑 앞에 모였다. 이 하마비는 전국의 어떤 하마비보다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자료였다. 대부분의 하마비는 비석만 우뚝 서있는데 경기전 하마비는 받침대와 받침대를 받쳐주는 두 마리의 해태(혹은 하마)가 원형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또 두 마리 해태의 모습도 얼굴이며 엉덩이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아 암수가 구별되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였다. 이 관장은 인상도 좋고 조용한 어조로 설명해 주니 참가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도 바짝 따라다니면서 한 가지라도 빼놓지 않고 더 들으려고 메모를 했다. 다음으로 경기전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이곳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초상화, 보물 931호)을 봉안한 곳이다. 전주에 어진이 모셔진 이유는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5대까지 살았던 본향이기 때문이고, 이런 곳을 가리켜 풍패豊沛라는 말을 붙인다고 했다. 따라서 전주를 가리켜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 한다. 전주의 남문인 풍남문豐南門이나 객사의 풍패지관豊沛之舘이란 편액도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본인이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고 하고, 선조들이 살았던 곳을 본향이라고 한다는 것을 오늘에야 확연하게 구별하게 되었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은 창업자創業者의 영정影幀이라는 점에서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본래 한양, 영흥, 개경, 전주, 경주, 평양 등 여섯 곳에 모셨는데, 임진왜란 중에 유일하게 전주 경기전의 어진만 보존되어 태조의 모습을 오늘까지 전해주고 있어 더욱 중요하다. 경기전의 어진은 이 지역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 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태인의 선비 손홍록 ․ 안의 등이 태조어진을『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정읍 내장산으로 옮겼으며, 이후 아산현 객사, 강화도, 평안도 영변, 묘향산의 보현사로 옮겨 봉안奉安하다가 1614년 22년 만에 다시 전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지금의 어진은 1872년 새로 모사模寫하였으며, 현재는 이 어진이 경기전 뒤편 역사박물관 1층에 봉안되어 있는데, 1년에 몇 차례만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앞쪽 경기전 건물에 모신 어진은 모사작품이다. 임진왜란 때 어진을 이안移顔시킨 오희길, 손홍록, 안의와 의병 여러분께 숙여 감사드리고 싶다. 이분들이 아니었으면 태조어진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어떻게 지킬 수 있었겠는가?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충신忠臣들이 아닐 수 없다. 이 관장을 따라 좌측에 위치한 수북청으로 갔다. 이곳은 1919년 일제 때 서편 부속건물을 철거하여 일본인 소학교를 건립(광복 후 중앙초등학교)하여 학교 건물로 활용하다가 2004년 복원復原한 건물이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역사를 지워버리기 위해 저지른 만행이며, 경기전도 없애려고 하였으나 민중의 민족적 거센 항의가 두려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라 잃은 백성들의 처지를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경기전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사무소였는데, 관리책임자는 참봉參奉 벼슬이었다고 한다. 토요일이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으로 보아 시민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높은 것 같았다. 태조 영정 모사본 어진이 모셔진 경기전에 들어설 때는 우입좌출右入左出해야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들어갈 때는 우측 문을, 나올 때는 좌측 문을 이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보아 예의를 중시한 조선의 유교사상儒敎思想을 엿볼 수 있었다. 문에 들어서니 전에 와서 보았던 가마며 여러 왕들의 초상화肖像畵가 보이지 않아 궁금했으나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유리관 안에 봉안된 태조의 어진을 보니 조선을 창건한 대왕의 위엄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이분 때문에 조선왕조 500여 년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이런 분의 어진을 전주에 다시 모시고자 역사학자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싶었다. 내가 사는 전주에 태조의 어진을 모실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 뿌듯한 자긍심自矜心을 느끼게 되었다. 경기전 경내 나무들이 지금은 앙상하지만 머지않아 녹음이 우거지고 꽃이 피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휴식공간이 되겠다고 생각되었다. 발걸음을 옮겨『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었던 전주사고全州史庫로 이동하였다. 임진왜란 때 어진을 정읍 내장산의 은적암, 비래암으로 이안할 때 실록도 함께 옮겨 보존하는데 사력死力을 다한 참봉 오희길과 선비 손홍록 ․ 안의 그리고 의병 100여 명이 죽음을 불사한 노고로 이를 지켰으며, 이후 여러 곳으로 옮기면서 보관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전주 경기전에 보관했던 실록實錄만이 전주사람들의 희생으로 병화兵禍로 사라질 번한 조선역사를 지켰던 것이니 민족사에 있어서 그 의미가 얼마나 크겠는가? 몇 발자국 지나자 조경묘(肇慶廟, 지방유형문화재 16호)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주이씨의 시조始祖 이한과 시조비始祖妣 경주김씨의 위패位牌를 봉안한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1세손이다. 영조는 사대부士大夫들도 시조始祖를 모시는 사당祠堂이 있는데 조선 왕실도 건립해야 한다며 전주에 해당관리를 보내 시조의 묘당을 짓도록 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최근에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녀皇女 이문용 여사가 이곳을 거처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조경묘와 구별되는 조경단(肇慶壇, 지방기념물 3호)은 건지산에 있는데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의 묘소다. 후원의 뜰을 거닐며 어진박물관으로 향하면서 해설자 이동희 관장은 달이 뜬 날 저녁 이곳에 오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달이 아주 예쁘며, 불빛에 비친 남문성당 건물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면서 한 번 와보기를 권하였다. 주변의 경관을 조성하는 사이 길을 따라 박물관에 들어서니 경기전에서 보이지 않던 역대 조선왕들의 영정이 보였다. 그리고 한가운데 유리관 안에 태조의 어진이 모셔져 있었다. 우리는 간단히 목례目禮로 예를 갖추고 해설을 들었다. 태조 어진은 조선왕조를 건국한 창업자로서의 위엄威嚴이 엿보였다. 지하에는 어진을 모실 때 사용했던 각종 가마들이 전시되어 있고, 영흥으로 태조 어진을 봉안할 때의 행렬도行列圖를 한스타일 전주 한지의 원료인 닥종이를 이용하여 제작 전시하였다. 이 또한 한국적인 전통문화傳統文化 중심도시이며, 풍패지향의 이미지와 예술도시藝術都市 전주가 심혈을 기울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경기전을 나와 풍남문豐南門으로 향하는데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먼발치에서 설명으로 대신했다. 풍남문은 전주성의 정문으로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으로도 불린다. 풍남문의 풍豊자도 풍패지향의 어원에서 조선왕조의 시조의 본향을 나타내기 위하여 썼다고 한다. 서문은 고사동, 동문은 동문사거리, 북문은 오거리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곳에 가면 빗돌이 그 흔적을 알려 주고 있다고 한다. 전라감영全羅監營인 옛날 도청 청사 건물로 갔다. 1951년 6·25전쟁 때 불타버리는 바람에 사적자료史籍資料들이 없어져 감영자리인 선화당宣化堂의 정확한 자리를 찾지 못했으나 오늘 해설자인 이동희 관장이 이곳저곳 수소문 끝에 그 당시 근무했던 분들의 증언을 통해 위치만은 찾았다고 한다. 전라감영 복원문제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우선 감영만이라도 복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빠른 시일 내에 복원되기를 빌었다. 한 가지 놀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전국에서 도세가 최하위로 밀려났지만 조선시대 때 전라도의 세대수는 전국 3위, 인구수는 전국 4위였다고 한다. 우측으로는 전주 부영府營 터로 옛날엔 전주시청, 지금은 중소기업은행이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풍낙헌豊樂軒인데, 조선 정조말의 읍지에는 음순당飮醇堂이라고 나온다고 한다. 조선이 몰락한 뒤 전주유씨全州柳氏의 제각祭閣으로 이전되었다가 2007년 전주향교 옆으로 옮겨 복원작업이 진행 중인 것은 다행일이 아닐 수 없다. 옛 전주시의 중심가를 조금 걷다보니 객사客舍가 보였다. 풍패지관豊沛之舘이란 편액扁額이 한눈에 들어왔다. 객사는 왕권王權을 상징하는 것으로 객사의 구조는 중앙에 주관主管이 그 좌우에 주관보다 조금 낮은 동 ․ 서양 익헌(翼軒)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주관에서는 궐패闕牌라고 하는 대궐 「闕」자를 크게 쓴 액자를 걸어 놓고 망궐례望闕禮를 행사하였으며, 양 익헌에서는 중앙의 관리 등 외부에서 오는 손님을 접대하였다. 이곳의 풍패란 글자도 태조 이성계의 본향에 근거하여 이름한 것이라 한다. 지금은 개방되어 전주시민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풍패지관이란 한자는 명나라 재상 주지번이 쓴 글씨로 세로 1.79m, 4자를 합친 가로 길이가 4.6m에 이르는 보기 드문 편액이라고 한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시조가 살던 본향인 전주는 역사적 가치로나 이를 보존하려고 희생한 선조들의 노력에 전주시민으로서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고, 역사교육의 산실産室이 되리라 믿는다. 오늘 약 4시간 남짓 자상하게 해설해 주신 이동희 관장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이 관장의 전주 역사 찾기에 대한 꾸준한 노력으로 전주의 역사가 점차 복원하게 된 것은 전주시민으로서 크게 박수를 보내도 좋을 것 같다. 마음의 고통보다 더 아픈 고통은 없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악醜惡한 행실은 없다고 했던 중국의 사가史家 사마천司馬遷의 글귀가 떠오른다. 학교 교육과정에서 역사시간이 축소된 것은 매우 안타깝다. 역사교육이 영어나 컴퓨터교육보다 못하다는 이야기인가. 우리의 선조들이 왜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키고 유물이나 유적들을 보존하려고 발버둥 쳤을까를 생각해 볼 일이다. 풍패지향이라는 거룩한 지역 전주에 살고 있는 우리 가족들에게도 내가 해설자로 나서 소중한 전주의 역사를 설명해 주며 전주의 역사를 일깨워 주어야겠다. (2011. 3. 12.) *망궐례 :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각 지방의 관원이 대궐에 있는 임금을 생각하며 궐패(闕牌)에 절하던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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