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버린 편지의 추억/한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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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버린 편지의 추억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한일신
내가 육필로 편지를 쓴 것은 컴퓨터를 사용하기 전 일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사연도 많지만 잊히지 않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여학교 때 선생님한테 받은 편지다. 설렘과 기대감으로 편지를 받아들고 읽고 또 읽으며 그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영어를 담당하셨던 서상분 수녀님은 예모(禮貌)가 바르다며 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 서 수녀님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인자한 분이라 여겨졌고 영어과목이 제일 재미있었다. 교과서를 구입 할 때도 영어책 한 권만은 꼭 새 책을 샀다. 방학 때가 되면 서툰 영어로 서 수녀님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영어실력을 쌓았다.
어느 날 아침 조회시간이었다. 느닷없이 서 수녀님의 목멘 작별인사가 귓전을 때렸다. 외국으로 가신다는 말씀에 나는 그만 하늘도 땅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떨군 채 조회시간 내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허전함과 깊은 고독감에 한동안 몸살을 앓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마음이 회복되었다. 그 무렵 우리 담임인 오 선생님께서는 외모가 준수한 총각 선생님으로 교내에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선생님께서 나에게 방과 후 영어 개인지도를 해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너무 황송한 나머지 망설이다가 선생님 의사에 따르기로 했다.
수업이 끝나자 나는 오 선생님과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며칠이 지났는데 하루는 왠지 공부가 집중이 안 되었다. 마음이 뒤숭숭해서 눈을 돌려 창문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유리창이 온통 새까맣지 않은가. 교무실 앞이 우리 교실이었는데 학우들이 집에도 안 가고 몰려와서 문틈으로 엿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죄인처럼 다리가 후들거리며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8명의 학우가 교탁을 에워싸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틈새를 비집고 보았더니 선생님께서 내게 보낸 편지글을 보고 있지 않은가. 너무 화가 치민 나는 왜 남의 편지를 몰래 가져다 보느냐며 냅다 빼앗아 그 자리서 북북 찢어버렸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내 가방을 뒤져 편지를 꺼낸 모양이었다. 그 편지는 여름방학 때 선생님께서 내게 보내준 단 1통의 소중한 답신이었는데. 막상 홧김에 편지를 찢긴 했지만, 마음 한 구석이 휑하니 텅 빈 것 같았다. 집에다 놓고 다닐 것을…….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오가는 편지가 공부에 관련된 것 말고는 별 내용이야 있었을까마는 그때는 학우들에게 어떤 비밀이 노출된 것 같아 몹시 속이 상했다. 아마 지금 같으면 왕따 당하기 십상이겠지만 그때만 해도 스승은 우리한테 존경의 대상이었기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날 저녁 나는 오 선생님께 밤새워 편지를 썼다. 선생님의 성의는 감사하지만, 학우들의 눈총을 받고 싶지 않으니 개인지도를 중단하고 싶다고. 뜻이 받아들여졌던지 그날 이후 나는 학우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는 요즈음 무언가 찾다가 안보이면 집에 있는 종이 휴지통을 뒤지는 버릇이 있다. 그 속엔 남에게 보이기 싫은 영수증이라든가 메모지 등 주로 허드재비가 찢긴 채 모여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종이 휴지통에서 메모지 한 장을 찾느라고 몇 시간을 헤맸다. 간신히 흩어진 메모지 몇 조각을 찾아냈다. 밑에다 넓은 종이를 깔고 그 위에 헝클어진 종잇조각을 위아래로 잇대어가며 대충 맞추어 보았다. 하지만, 그때 학우들이 훔쳐다 본 편지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찢어버렸으니 어찌 찾아볼 엄두나 내겠는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찢어버린 그 편지가 긴 아쉬움으로 남는다. 좀더 침착하고 냉정하게 일을 수습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지금쯤 새까만 눈동자의 학우들과 오 선생님, 아니 오 교수님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들 사실지 궁금하다. 아직도 내 맘 한구석에 아름다운 무지개 빛깔로 자리 잡고 있는 찢어버린 편지의 추억이 오늘따라 마냥 그립다.
(201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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