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다니는 박물관/김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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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다니는 박물관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밤 김길남
무더운 여름에 한 줄기 소나기 같은 시원한 옛날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더 없는 즐거움이다. 아는 이야기도 좋고 모르는 설화라면 더욱 반갑다. 더구나 이야기하는 사람의 입담까지 구수해서 감칠맛이 난다면 한없이 듣고 싶어진다. 자주 참가하는 역사탐방 길에 연로하신 어른이 들려주는 옛이야기는 참으로 귀를 솔깃하게 했다.
하나. 유월무송(六月無宋)
김제시 금구면 불노리는 송 씨가 많이 사는 마을이다. 그 마을 송 씨 문중의 중시조가 된 이야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전국을 유린하고 그 횡포가 심했을 때 일이다. 그 마을에도 왜적이 침입하여 남자는 모두 살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였다. 송 씨의 아내도 화를 입을까 두려워 짚더미 속에 숨었다. 사람을 찾으려고 혈안이 된 왜군이 짚더미 속을 칼로 찔렀다. 그 여인은 뱃속에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몸을 찔렸으나 ‘아이쿠’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는 죽어도 괜찮으나 뱃속의 아이는 살려야 했다. 찔려 피가 묻은 칼을 치맛자락으로 잡아 닦아 피가 보이지 않게 했다. 다행히 들키지 않아 살아남았다. 적군이 물러간 뒤 나와 보니 남자는 모두 죽고 없었다. 6개월이 지난 뒤에 아이가 태어나니 다행히 아들이었다. 여섯 달 동안 송 씨가 없다가 드디어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유월무송(六月無宋)이다. 그 후손이 번성하여 유명한 불노리 송 씨가 되었다.
둘. 호점혈(虎點穴)
경상북도 청도에 가면 김해김씨가 많이 산다. 조선 초에 김극일이란 사람이 살았다. 효심이 남달라 부모님을 극진히 모셨다. 부모가 아프면 극진히 간호하고 설사가 심할 때는 변을 찍어 맛을 보며 병세를 살폈다. 부친상을 당하자 묘 옆에 움막을 치고 여묘(廬墓)사리를 했다. 효성이 지극하니 하늘이 감복했던지 호랑이가 옆에 와서 지켰다. 먹을 것을 던져주면 받아먹고 잡 짐승을 막아 주었다. 여묘사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려 하니까 호랑이가 바짓가랑이를 끌어 당겨 따라갔다. 한 곳을 발로 긁어 표시를 해 주었다. 자세히 보니 그게 명당자리였다. 죽은 뒤 호랑이가 잡아준 자리에 묘를 쓰고 자손이 크게 번창했다는 호점혈 명당이야기다.
셋. 마상격문(馬上檄文)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일 때 호남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나 나라를 지켰다. 그 선봉에 선 사람이 호남의 제봉 고경명 장군이다. 25세에 식년시에 장원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마지막으로 동래부사를 지냈다.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았다. 전주에 이르렀을 때 임진강에서 관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라를 구하려는 급한 마음에 말위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써서 호남 각 고을의 수령과 선비들에게 보냈다. 이른바 마상격문이다. 이 격문이 명문장인 최치원의 황소격문, 제갈량의 출사표에 비견되는 명문이라 한다. 격문을 받은 식자들이 감동을 받아 호남의 열혈남아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담양에 모여 고경명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6천명의 의병을 이끌고 임금을 지키기 위해 의주로 가다가 먼저 호남에서 왜적을 몰아내려고 금산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수적 열세에 밀려 애석하게도 둘째아들 인후와 함께 순절하니 그의 나이 60세였다. 큰아들도 다음해에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여 3부자가 순국 충절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분은 역사나 인물에 대하여 잘 알았다. 남의 집 족보이야기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고경명 선생의 묘를 찾아가서는 임진왜란 4충신 이야기를 해주고, 초의선사 유적지에 가서는 일지암에 얽힌 설화를 들려주었다. 몇 년간 따라다니다 보니 절로 존경심이 들었다. 아마도 평생을 그런 문헌에 심취했고 또 취미도 있어 박식하게 되었으리라. 이렇게 지역에는 향토사를 잘 아는 사람이 있다. 각 고을에는 이런 분이 한둘은 있어 역사를 살려낸다. 큰 역사는 물론 작은 향토사도 보배같이 여기며 발굴하여 사라지지 않도록 길이 보존해야 하리라.
나도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고적이나 문화유적을 많이 찾아다니고 책도 읽었지만 그 때뿐인데 어떻게 모두 기억하는지 부러웠다. 그래서 그 분을 '걸어 다니는 박물관'이라 했다.
( 2011. 1.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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