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윤상기
페이지 정보

본문
윤상기 에세이-보길도(甫吉島)
아침햇살이 비치는 보길도는 빛나는 홍보석처럼 아름답다. 일곱 번째 이곳을 찾아왔다. 나에겐 이상한 습성이 하나 있다. 내 마음에 흡족한 곳이면 신물이 나도록 여러 번 되풀이해서 그곳을 찾아간다. 어떤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삶이 무겁게 느껴지거나 외로워지면 이끌리듯 그런 곳으로 떠난다.
완도에서 보길도로 들어가는 배 시간을 맞추려면 잠을 설치고 꼭두새벽부터 서둘러야한다. 배에서 내려 보길도 선착장을 지나면 수령 오백년을 자랑하는 아름드리 후박나무 숲이 있다. 거기서 조금 가면 중리 백사장이다. 백사장에서 흰 포말을 그리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여기에 와 서있는지도 모른 채, 멍하니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 속을 헤매는 방랑자처럼.
방랑자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보길도는 자전거 탐방이 제격이다. 도보와 자전거로 둘러봐야 보길도의 아름다운 비경을 샅샅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고 맨 처음 찾은 곳은 솔숲이 어우러진 통리 백사장이다. 한적한 백사장에 젊은 연인이 어깨동무를 하고 걷고 있다. 순간, 아, 나도 저런 젊은 시절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사장 모래 위로 추억처럼 몰려오는 하얀 파도를 한참을 지켜봤다. 다시 찾아온 애송리 깨돌밭 해수욕장. 싸르륵, 싸악 싸르륵, 싸악, 깨돌은 검은색에 흰점이 깨알처럼 섞인 밤톨만한 조약돌이다. 깨돌 밭에 풀썩 주저앉았다. 파도에 씻겨 내리는 깨돌의 연주음이 처연하다. 어느 해 여름 밤,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잤었다. 돌을 스치는 파도소리가 밤새 내 귀를 뒤척이게 했다. 먼 길 떠나는 남정네의 한숨 소리 같기도 했고, 이별의 아픔을 어쩌지 못하는 여인이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며 흐느끼는 것 같기도 했었다.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었다. 닳고 닳아 매끈하다. 수억, 수백 년의 세월을 물결에 휩쓸리고 바람에 닳아져 이 모습을 얻었을 것이다. 인간의 수명은 겨우 백 년 이쪽저쪽이다. 그 짧은 삶속에서 방황하며 미망 속에서 살고 있다. 몽돌과 비교하니 사람의 한 생이 우습다. 혼자 떠나와 이곳에 풀썩 주저앉은 내 쓸쓸한 방랑을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육지의 그들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온 느낌이다. 파도 소리, 그 높은 아우성은 차라리 고요하고 적막하다. 사람의 생이 다 이슬 같을 진대 잠시 스치는 잡념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스치는 생각 생각을 다 바람결에 실어 보낸다.
고산 윤선도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세상을 멀리하고자 제주도로 향하였다. 제주도로 가는 도중 보길도에 잠시 들렀다가 이 빼어난 산수에 매혹되어 이곳에 터를 잡았다는 고산. 애송리에서 길재를 넘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적자봉 양지바른 산자락에 마련한 보금자리, 그리고 부용동, 그 앞을 보면 노화도를 눈앞에 두고 세연정이 풍경화처럼 자리하고 있다. 세연정은 고산의 기발한 발상이 잘 나타난 곳이다. 개울에 보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된 세연지는, 산중에 은둔하는 선비의 거처로는 규모가 큰 정원이다. 사람의 인위적인 손길을 가급적 피하고 자연과 어우러진 조경을 보는 사람마다 고산의 택리지에 감동하게 한다.
고산도 나처럼 부질없는 생각을 해봤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이곳에서 살았을까? 오로지 그가 이루지 못한 뜻만을 이곳에서 펼치고자 했을까? 혹자는 이곳이 그의 작은 왕국이었다지만, 그는 정의를 말로써 구할 수 없고, 힘없는 나라의 실정에 비분하여 몸과 시간을 이곳에 잡아 두었을 것이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아픔을 어부들과 교감하며 고독한 여생을 이 섬에서 지냈다. 자연과 그 안에서 얻은 정서를 한자漢子가 아닌 우리말로 술술 풀어 노래하며 고독한 심정을 달랬던 것이다. 그 자취가 가사문학이란 큰 업적으로 남아있지 않은가.
갯바람에 실려 온 비릿한 멸치냄새, 그것은 바로 바닷사람들의 체취였다. 나는 어촌도로를 따라 뽀쪽산(보죽산)으로 향했다. 여름 내 햇빛을 받아 잎마다 윤기가 흐르는 동백나무 숲에 이르렀다.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보옥리 공룡 알 갯돌 밭에는 큰 호박덩어리만한 수많은 몽돌이 흩어져 있다. 모나고 큰 돌이 매끄러운 몽돌이 되기까지는, 긴 세월, 돌과 돌이 부딪치고 부서지고, 파도에 맞고, 바람에 흔들리고, 그랬겠지, 손으로 표피를 쓰다듬었다. 질감이 더없이 부드럽다. 이 부드러운 감촉은 보이지 않는 작은 굴곡이 수없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보길도는 부용동 팔경과 보길도 십경을 가진 보물 같은 섬이다. 아름답고 슬픈 전설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대는 신이 내린 선물이다. 맑은 가을날이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보너스가 주어진다. 유독 날씨가 맑았다. 바다 멀리 한라산이 어렴풋이 눈에 보였다. 희미한 안개 속에 넓죽 엎디어 있는 한라산, 이곳에서 제주도 한라산을 보는 것은 특별한 행운이다.
이튿날 아침, 바다에서 솟아오른 찬란한 햇살이 섬을 붉게 물들였다. 솟아오르는 해를 보며 큰 호흡으로 기를 충전했다. 이제 섬과 작별해야할 시간이다. 섬에 오기 전 심란하게 일어났던 생각들이 사그라졌다.
배가 섬을 두고 멀어진다. 뒤를 돌아보니 뽀쪽산이 굽어보고 있다. 바다를 끼고 우뚝 서 있는 뽀쪽산은 언제보아도 아름답다. 산철쭉과 산 벚꽃이 피고, 여름에는 먼 바다를 건너온 이야기가 쉬어 가는 곳, 가을이면 긴 장대를 매단 고깃배가 추자도까지 삼치 떼를 쫓아 흰 물살을 가르며 나가면, 암벽에 서 있는 진홍빛 단풍이 손을 흔들며 배웅한다. 겨울이면 동백꽃이 노송에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수놓는 섬, 보길도. 그 스침의 인연이 나를 부르면 다시 오리라. 언제든.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