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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 밭두렁/김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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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749회 작성일 09-08-0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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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 밭두렁 전주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야간반 김길남 지금도 가끔 꿈을 꾼다. 우리 논이 홍수가 나서 물속에 잠기는 꿈을 꾼다. 애가 타서 걱정을 하다 깜짝 놀라 깨면 꿈이다. 몸은 전주에서 살아도 머릿속 저 어디엔가는 어려서 농사짓던 기억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농민의 아들이다. 농촌에서 태어나 논두렁 밭두렁에서 잔뼈가 굵었다. 고향집에서 30여년 살며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논 열두 마지기와 밭 두 마지기가 터전이었다. 13살 때부터 학교 다니며 농사일을 거들었다. 쉬는 날이나 방학은 논밭에서 일을 하며 보냈다. 그것이 생활의 전부이니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한 줌이라도 더 거두어 들여야 하므로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우리 논은 만경강의 지류 마산천 유역에 있었는데 진보들이라 했다. ‘진보’라는 보를 막아 그 물로 농사를 지었다. 비가 많이 오면 상류의 물이 아래로 내려와 홍수가 졌다. 마산천 제방을 막아 놓아 더 낮은 큰 들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만경강 물도 수위가 높아 빠지지 않으므로 홍수가 날 수밖에 없었다. 홍수가 나면 어쩔 수 없이 발만 동동 굴렀다. 하루 이틀 사이에 빠지면 다행인데 사흘을 넘기면 벼가 죽어 버렸다. 그런 해가 한 번 있어 수확을 하지 못했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사람이 수확을 못했으니 그해 고생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경지정리가 되지 않아 열 두마지가 네 배미였다. 봄이 되면 논두렁에 붙여 놓은 발래를 떼었다. 우리 논보다 낮은 쪽의 논두렁에는 발래를 붙여야 물이 새지 않았다. 매년 한 번씩 발래를 붙여 농사를 짓고 이듬해 봄에 떼었다. 긴 논두렁의 발래를 삽으로 떼려니 힘이 들었다. 두렁허리(움지)란 놈이 논두렁에 구멍을 뚫어 놓으면 애써 품어 놓은 물이 아래 논으로 새어버려 큰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면 구멍을 찾아 삽으로 파서 기어이 두렁허리를 잡아야 했다.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지으려면 논두렁은 그 만큼 중요하였다. 논두렁은 논의 경계가 되고 물을 가두는 작은 둑이다. 안에서 자라는 벼를 보호하고 감싸주는 시설이다. 모를 심을 때는 점심을 먹는 장소가 되고 논을 맬 때는 잠시 쉬며 샛거리 술을 마시는 곳이기도 하다. 힘들여 일하고 논두렁에 죽 둘러 앉아 막걸리 한 잔씩 마시고 담배를 피우던 일꾼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려서 숟가락을 들고 밥을 얻어먹으러 간 기억도 난다. 어려운 시절에는 어머니가 일을 하시는 집의 논에 따라가 논두렁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주인이 가지고 온 숟가락이 부족하니까 각자 가지고 가야 했다. 얻어먹는 논두렁 밥은 어찌도 그리 맛이 있었는지 모른다. 논두렁에 풀이 우북하면 벼가 자라는데 방해가 되므로 낫으로 베었다. 농사일이 거의 끝나가는 늦은 여름에 베었다. 숫돌을 가지고 가 갈아가며 베어야 했다. 햇볕은 뜨겁고 숨도 차는데 풀을 베기가 쉽지 않았다. 벤 풀은 지게에 짊어지고 와서 퇴비장에 쌓았다. 풀을 베다 잘 못하면 손가락을 베기도 했다. 나도 여러 번 손가락을 베어 그 흉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다른 벼보다 일찍 패어 여무는 벼가 있었다. 여름 양식이 떨어지고 추석이 돌아 올 무렵 벼가 일찍 익어 먹는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애국도라 하는 벼는 목이 갈색이었는데 참새 떼가 어떻게 알고 찾아와 짜 먹는지 새를 보아야 했다. 논두렁에 서서 ‘우여! 우여!’ 새를 쫓았다. 먼데 앉은 새를 쫓으려고 새 팔매도 만들고, 새끼를 처음은 두껍게 꼬다가 점점 가늘어지게 하여 나무 끝에 묶어 돌리다 땅에 치는 딸기치기도 이용했다. ‘땅 땅’ 큰소리가 나면 새는 도망가고 오지 않았다. 허수아비도 한 몫을 했다. 마을 앞에 두 마지기의 밭이 있었다. 이 밭은 아버지께서 산비탈을 일구어 손수 만드신 밭이었다. 가까워 자주 가 둘러보고 곡식의 자라는 모습을 살폈다. 밭두렁을 한 바퀴 돌면서 살피고 돌아왔다. 아침 일찍 가면 아랫도리 옷이 다 젖었다. 낮은 곳이라 논으로 만들어 벼를 심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밭으로 이용했다. 어려서부터 젊은 시절까지 애환이 담긴 밭이었다. 아래의 논과 높이가 차이가 커서 밭두렁이 잘 무너졌다. 비가 많이 내리면 자주 무너져 말뚝을 박고 튼튼히 고치기도 하고 잔디를 입혔다. 가을에 보리를 심어 봄에 베었다. 보리밭에 독새기풀이 많아 뽑는데 힘이 들었지만 새파랗게 자라는 것을 보면 흐뭇했었다. 여름에는 고구마를 심고 콩을 갈았으며 고추를 가꾸었다. 사이사이에 나는 풀을 뽑아야 하므로 뜨거운 여름의 밭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가을에는 무와 배추를 심어 김장을 하였다.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며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먹을 것은 모두 가꾸어 내는 참 귀중한 땅이었다. 지금은 논은 경지정리를 하여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물길도 바뀌어 논에 갈 때 건너 다니던 냇물도 없어졌다. 그러나 밭은 그대로 남아 오고갈 때면 옛날이 그리워진다. 곡식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찾아가 살펴보고 거름도 주고 농약도 치고 병을 예방해야 충실하게 자라므로 하는 말일 게다. 부지런한 농민은 일찍 일어나 논밭을 한 바퀴 돌고나서 아침을 먹었다. 논두렁에 서서 잘 자라는 곡식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더구나 벼가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누가 보태 주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아무리 문화가 발전하고 소득이 높아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먹고 입고 자는 것이 기본이다. 요즘은 농민이 못산다고 다들 농촌을 떠나지만 사람이 사는데 기본인 먹을 것을 생산하는 곳은 농촌이다. 우선 먹어야 일하고 즐기고 문화생활을 향유할 게 아닌가. 기본을 생산하는 농촌과 농민을 귀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농촌에 남아 논두렁 밭두렁을 지키는 농민을 우러러보아야 할 것 같다. ( 2009. 8.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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