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우리 집 10대 뉴스/김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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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친 한 해
-2010년 우리 집 10대 뉴스-
행촌수필문학회 김병규
다난했던 경인년이 고난과 우환을 싸들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북녘의 만행이 천안함 사태를 일으켜 46명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시켰고, 연평도 포격까지를 유발하여 5천만 남녘동포들의 가슴에 분노의 불씨를 심었다.
우리 집 가족사에도 우환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당한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나는 집안의 우환덩어리가 되었다. 좋은 일보다 궂은 일이 많았던 한 해를 기록하고, 그 과정을 거울삼아 새로운 희망을 안고 신묘년(辛卯年) 새해를 맞으려 한다.
첫째, 아내 동기간의 만남
새해 첫날, 뿔뿔이 흩어져 살던 아내의 동기간 7남매가 우리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이웃 동네에 살고 있는 동서 내외와 손님 맞을 준비로 마음을 썼다. 위로 큰처남 내외와 큰 처형이 사정이 있어서 불참하고 5남매가 다 모였다. 실로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동기간의 만남은 반갑고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밤 깊은 줄 모르고 술잔을 나누며 정담을 나누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해마다 1월 1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집집이 돌아가며 만나기로 했는데 내년에는 손아래 처남 조병천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둘째, 연초부터 재발된 우환
지난해 연말 나에게 상복(賞福)이 터졌다. 지식경제부 우정사업본부가 주관한 제24회 가을맞이 편지쓰기대회에서 영광의 대상을 받게 되었다. 행촌수필문학회가 주는 제2회 행촌수필문학상도 받았다. 이와 같이 연말에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부실한 몸으로 서울까지 왕래하며 다소 무리하게 활동한 일밖에 없는데, 연초부터 허리 통증이 재발되었다. MRI 촬영 결과 지난해 골절되어 시술한 허리뼈 아래 3번 뼈가 또 골절이라 했다. 앞이 캄캄했다. 병원의 진단에 따라 2월 8일(음력 12월 25일) 다시 시술을 했다. 시술 3일 만에 퇴원하여 집에서 가료를 했다.
셋째, 즐겁고 행복한 설맞이
집에서 아내의 정성어린 간호로 치료하며 설을 맞았다. 두 딸과 두 아들의 식솔들이 모두 모였다. 내 투병생활에 위로의 정이 담겨있었다. 큰아들의 집례로 경건하게 가정예배를 드렸다. 이어서 큰사위가 주관하여 차례로 세배를 하였다. 나는 일곱 손자와 손녀들에게 똑 같은 수준의 세뱃돈을 주고 격려를 했다. 순서에 따라 세배가 진행되는데 푸짐한 선물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몸은 불편했으나 마음은 한 없이 행복했었다.
넷째, 허리 뼈 3차 시술
재가치료가 잘되는가 싶었는데, 3월에 접어들면서 다시 심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일어설 수도 앉을 수도 없이 통증이 심했다. 다시 입원하여 MRI 촬영을 해 보니 결과는 청천벽력이었다. 시술한 요추 2번과 3번의 위 아래로 1번과 4번이 동시에 골절이라 했다. 앞이 캄캄하고 절망뿐이었다. 담당의사도 판단이 서지 않는지 경과를 지켜 보자고만 했다. 화장실도 다니기 힘든 불편한 입원생활 2주일이 되었다. 입원 2주 만에 동시에 두 군데 3차 시술을 하기로 했다.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 대기하던 10여 분은 지옥 같은 순간이었다. 수술대에 엎드렸다. 사지가 묶였다. 마취를 하고 시술을 시작했다. 가물가물 들리는 간호사의 음성이 꿈결만 같았다. 의사의 민첩한 손놀림이 감지되었다. 사각사각 살을 째는 소리, 망치로 텅텅 치는 소리도 들렸다. 두 군데나 하는 시술인데도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술 뒤 통증은 다소 완화되었으나, 미동도 하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가 나를 옥죄었다. 나는 네 마디의 허리뼈를 시술하여 온전치 못한 몸이 되어버렸다. 정신이 든 뒤에는 캄캄한 어둠만이 앞을 가로 막았다. 침침한 눈을 비벼보았다. 창밖에 덕진공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벚꽃이 구름처럼 피어있고 그 아래를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언제나 저렇게 걸을 수 있을까? 아니 걸을 수나 있을까? 절망과 희망의 소용돌이 속에 고통이 슬픔이 되어 눈시울이 젖었다. 간병하는 아내가 애처롭게 보였다.
다섯째, 하늘로 여행을 떠나가신 사돈어른
큰사위 부친이 먼 길을 떠났다. 내 연상이지만 깐깐하고 건강한 분이었다. 건강을 믿고 건강검진도 받지 않고 살던 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혈뇨가 나오고 통증이 있어 병원을 갔더니 급성 전립선암이라 했다. 효성이 지극한 큰사위가 곁에 있으며 수술을 시키고 백방으로 서둘렀으나 현대의학도 가는 길을 막지는 못했다. 건강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허탈한 심정으로 조문을 갔더니, 초등학교 3학년인 외손자가 상복을 입고 영전에 앉아 있다가 달려와 내 품에 안겨 흐느꼈다. 내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여섯째, 아내의 칠순(七旬)
8월 19일(음력 7월 10일)은 고희를 맞는 아내의 생일이다. 스물세 살 곱던 나이에 나를 만나 47년, 어렵고 힘든 길을 참고 살아온 사람이 나의 아내 조인순 여사다. 그의 곱던 얼굴엔 주름살이 지고 머리는 반백이 되었다. 자식들은 일가친척과 이웃사촌을 모시고 조촐하나마 잔치를 열자고 했으나 아내는 집안의 사정을 들어 반대하였다. 자식들이 뜻을 모아 천등산가든에서 조촐한 잔치를 열었다.
일곱째, 다시 찾은 강의실
나는 지겹고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에서도 희망을 붙들고 있었다. 금년 하반기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강의실에 가겠다는 신념으로 투병생활을 했다. 그 꿈이 현실로 되기까지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했다. 아무리 굳은 의지력에도 통증에는 이길 장사가 없었다. 아내의 부축 없이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던 내가 여름이 되면서 주변 산책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9월이 왔다. 나는 복대를 두른 몸으로 지팡이를 짚고 309 강의실을 찾았다. 따뜻한 정으로 맞아주는 문우들이 고마웠다. 교수님의 격려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고통을 딛고 이렇게라도 거동할 수 있어 모처럼 우환을 훌훌 털고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다.
여덟째, 전북은행 사보 ‘전은가족’에 게재된 나의 수필
홍보실에서 원고청탁이 있어 <가을을 맞으며>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보냈다. 그 글이 채택되어 가을호 표지 안쪽과 26쪽에 전북문인이란 이름으로 깔끔하게 실린 내 글을 보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자랑스럽기도 했다. 사경에서 벗어나 걸음마로 겨우 활동하는 나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원고료도 15만 원이나 받았다. 글을 써서 더러는 상품권을 받기도 했으나 원고료를 받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아홉째, 큰손자 김진우 팔 골절
여름방학 때 중학교 2학년인 손자 김진우가 왔는데 왼팔이 우둔하게 보였다. 까닭을 물으니 축구를 하다 넘어져 골절상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완치 단계에 있으나, 치료하는데 많이 힘들었단다. 고생을 하면서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걱정할까봐 숨겼다고 했다. 사람 사는 세상이 만만한 것은 아니니 매사에 조심하라고 이르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손자들의 대학 입학 때 등록금에 보탤 요량으로 보장성 상해공제를 들었다. 상해공제금을 신청했더니 6십만 원이 나올 예정이란다. 그 돈은 손자 김진우의 손에 꼭 쥐어줄 예정이다.
열 번째, 손녀 김서형 백일장 우수상 수상
초등학교 5학년 손녀 김서형이 충남 서산시에서 실시하는 백일장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서형이는 초등학교 1학년인 동생 김정욱과 내 생일 때 축하의 편지를 썼는데 감동하도록 잘 써서 칭찬해 준 일도 있다. 글 쓰는데 소질이 있는 듯하여 기분이 좋다. 그 소질을 살리도록 뒷받침을 해 줄 생각이다.
인간의 삶에는 늘 즐거움과 어려움이 뒤섞여 따라온다. 그것이 인생이려니 싶다. 고난을 극복하고 희망을 찾으려고 몸부림쳤던 2010년 한 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2011년은 토끼해다. 토끼의 재롱에 웃음꽃이 활짝 피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가오는 토끼해에는 우리 집에도 고난과 고통이 사라지고 토끼처럼 밝고 명랑하며 웃음꽃이 만발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가족 모두 “스스로 힘을 길러 이웃을 돕는 우리 가족이 되자”는 가훈을 성실히 실천하여 명랑하고 씩씩한 한 해가 되리라 기대한다.
(2010.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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