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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윤석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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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658회 작성일 10-11-27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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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 터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윤석조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내 몸에는 희미하게 남아있는 크고 작은 흉터가 네 군데나 있다. 부모님께 막말을 했던 죄로 괴로울 때가 있다. 초등학교 때 산에 땔감을 하러 다니면서 얻은 흉터가 왼발 발등에 희미하게 남아 있어서 그 옛날의 상처를 말해주고 있다. 광복 후에 어린 소나무까지 베어 땔감으로 쓰니 주변 야산은 거의 민둥산이 되었다. 땔감을 구하려면 어른들은 도시락을 지게에 매달고 이십여 리 이상 먼 산으로 가서 나무를 해 왔었다. 우리 또래들은 동네 근처 야산에 난 풀뿌리를 캐어 땔감을 해 왔었다. 어느 날 억새풀 뿌리를 향해 괭이를 휘두른 것이 왼발 발등에 꽂혔다. 형들이 쑥을 이겨 발등에 붙여주고 옷을 찢어 발을 감아주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머리에 사마귀가 났었다. 수업시간에 나도 모르게 손이 머리로 올라가서 사마귀를 집어 뜯다보니 손톱에 피가 묻었지만 그 재미가 보통은 아니었다. 수업은 어느새 끝나고 머릿속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 후회뿐이었다.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었으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했었다. 사마귀를 없애는 작업을 아무도 모르게 하였다. 방학 중이라 집을 보면서 살강 밑 한 쪽에 있는 양잿물 그릇과 양잿물을 찍을 솔잎을 준비하였다. 거울을 벽에 걸어놓고 사마귀에서 피가 나도록 뜯은 다음 양잿물이 묻은 솔잎을 사마귀 가운데에 묻혔다. 조금 지나자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온 머리가 후끈거려 겁이 덜컥 났다. 그 와중에도 화학 선생님의 산과 알카리의 중화(中和) 설명이 생각났다. 돼지우리 옆에 있는 신구정물을 따라내고 그 찌꺼기에 머리를 처박고 한참 있었다.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화학 실험을 혼자 잘한 셈이었다. 늦게 들어오신 어머님한테 꾸중을 많이 듣고, 그 이튿날 아침 일찍 이웃 마을로 피난(6ㆍ25 사변 중) 나온 의사한테서 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어린 학생이 겁도 없이 독약(강 알카리)을 썼다며 핀잔을 주었다. 20여년이 지나 또 손을 대서인지 조금 살아있던 부분이 커져서, 외과 병원에서 수술로 제거했다. 그 흉터가 작은 동전만 하게 남아 있다. 겁 없던 소년시절의 흉터를 머리카락이 덮어주고 있어 다행이다. 중ㆍ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봄, 가을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다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가을 소풍을 내장산으로 간다는데, 중고 시절 마지막 소풍이고 단풍으로 유명한 산이라고 초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워 더 따라가 보고 싶었다. 보내달라고 어머님께 사정하였으나 허사였다. 그날 어머니와 함께 마른 논에서 벼를 베고 있는데, 친구들이 타고 가는 기차의 기적이 가깝게 들려왔다. 기적소리를 듣고 어머님께 심술을 부리다가 벼를 베던 낫 끝이 오른 손 손바닥에 꽂혀, 그 흉터가 조금 남아있다. 잘 살펴야 찾을 수 있을 정도다. 흉터가 스스로 없어지는 것처럼 나도 어렵고 가난했던 때를 잊어가고 있다. 배 오른쪽에 푹 파인 흉터가 있다. 대학 1학년 때 급성맹장염을 앓아 수술한 자리다. 1956년 봄, 객지에서 선배들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도립공주병원장이 썩은 내 창자 한 토막을 잘라냈었다. 그때는 맹장수술도 명의라야 했으며 내가 운이 좋았다고들 했다. 사흘 뒤에 어머니가 소복차림으로 병원으로 찾아 오셨다. "너 죽었다고 소문났다. 너 죽었으면 나도 금강에 투신하려고 이렇게 소복차림으로 왔다." 하셔서 어머니 품에 안겨 함께 울었다. 그 흉터를 만져보며 어머님의 모습을 그려 본다.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이선근 형의 고마움도 잊지 못한다. 등단하여 문인의 길을 걸으며 솔솔 재미를 느끼던 2003년 연초였다. 잘 먹고 사는데 손가락에 거스름이 생기고 소화도 안 되어 검진을 받고 싶었다. 친구들 모임에서 추천해 준, 전북대학병원 소화기내과 이수택 교수의 특진을 받고 위암 초기 진단을 받았다. 다시 국립암센터에서 위암 초기임을 확인하고 배재문 박사의 집도로 위를 2/3를 잘라냈다. 나도 울었고 자식들과 형제자매들도 울렸던 그 큰 흉터가 내 가슴 밑에서 배꼽까지 길게 나 있다. 공자는 죽을 때 제자들에게 내 몸에 흉터가 있는지 살펴보라고 하였다던가. 몸에 흉터가 있으면 부모님을 놀라게 한 사람이니 효자의 자격이 없다는 뜻이라고 들었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효자 근처에도 못갈 사람지만, 자식들과 형제자매들 그리고 친구들이 고마울 뿐이다. 제대하고 복직했던 해 여름이었다. 긴 장마로 보리가 썩을 정도가 되자 쌀값이 폭등하였다. 한 달 봉급을 하숙비(쌀 54kg)로 다 내야 했다. 하숙 주인도 미안했던지 무조건 나가달라고 하였다. 같이 하숙한 선생님은 사모님들과 살림을 시작했고, 나는 방을 구해 자취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식 반찬 해 준다고 멀고 먼 길을 어쩌다 오시던 어머니가, 아예 봉급날이면 나보다 먼저 자취방에 와 계셨다. 그때 우리 집에서는 낡은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짓고 있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때였지만, 남이 알까봐 부끄럽고 창피하였다. 돈은 송금할 터이니 제발 봉급날은 오시지 말라고 당부하였으나 몇 달째 계속되었다. 어머니가 반갑기는커녕 빗진 사람에게 빗을 받으려고 봉급날 직장을 찾아오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다음 달 또 오셨을 때, 공주병원에서 어머니가 내게 하신 말씀을 내가 하면서 두고두고 잊지 못할 불효막심한 말을 하였다. 내가 죽었으면 저승에서도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히려고 소복차림으로 오셨느냐고 쏘아 붙였다. 그 뒤부터 어머님은 오시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어머니는 내게 그 말이 그렇게 서운하였다는 말씀으로 화를 푸셨다. 우리 집으로 오셔서 함께 살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내 몸에 많은 흉터와 어머님의 가슴에 못을 박은 말이 지워지지 않는 내 가슴속의 흉터가 되어, 오늘도 이 불효자를 울게 하고 있다. 어머니!……. (2010.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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