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깨밭에서/이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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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 밭에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이금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한 줄기 소나기가 지나가면 불볕더위는 다소 가라않지만 농촌의 고추말리기와 참깨 수확은 꽤나 힘들다. 뜨거운 태양 아래 벼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고 여물어가는 들녘은 가을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제도 어제도 아니나 다를까 또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는가 싶더니 비가 억수로 퍼붓는다.
태풍 콘파스가 북상한다는 소식이 시시때때로 텔레비전 자막을 통해 전해지면서 긴장감은 더했다. 올여름은 거의 날마다 굵다란 소나기가 내린다. 콘파스가 남부지방을 강타하기 전에 밭에 세워둔 참깨를 털려고 아침 일찍 새참으로 먹을 쑥개떡을 찌고 마실 물을 넉넉히 준비하였다. 오늘 오후부터 태풍의 영향권에 든다고 하였는데 오후에 또 비가내리면 안 될 것 같아 서둘렀다.
정읍에 모임이 있어 다녀오는데 길가에 세워든 참깨다발이 비바람에 흠뻑 젖어 쓰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내 눈엔 여기저기 늘어놓은 참깨만 보였다. 내 참깨, 내 참깨는, 어렵사리 가꾼 내 참깨는 온전한지 물가에 세워둔 자식 걱정하듯 비바람에 쓰러졌을 참깨를 걱정했다. 마른 참깨다발은 바람만 스쳐도 쏟아져 버리는데 애써 가꾼 참깨농사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가꾼 참깨도 저 지경이 되기 전에 어서 가서 털어야지. 밤새 비가 그치고 아침 하늘은 청명하였다.
어제 오후에 내린 소나기로 밭고랑에 물이 고여 있고 장화를 신어도 발이 푹푹 빠졌다. 참깨 터는 작업을 어제 오후에 하려고 했지만 오후 내내 억수로 비가 내렸으니 그럴 수밖에. 다행이 말뚝을 세워 비닐로 묵어놓아 비도 새지 않고 깨 다발도 넘어지지 않았다.
나는 참깨를 털고 남편은 묶어서 다시 세웠다. 발이 푹푹 빠지니 아무리 해도 일이 줄어들지 않았다. 일을 능률적으로 하려면 구부정하게 서서 탁!탁!탁!탁! 털어야 되는데 허리가 아플까봐서 앉아서 툭~ 툭~ 서서 탁~탁~털고 있으니 더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깨알이 쏟아지듯 땀방울이 쏟아졌다. 작년에 지인이 참깨를 10kg 수확했는데 어렵지 않고 재미있다고 하여 나도 하면 되겠지 싶어서 세 이랑이나 심었다. 참깨농사를 한 번 지어보자고 남편에게 졸랐던 일이 후회가 된다. 남편은 현기증을 느끼고 쓰러질 것 같다고 하였다.
기운이 없어서인지 쏟아지는 참깨도 반갑지가 않았다. 참깨 농사를 지어 신나게 털면 깨 쏟아지는 재미가 퍽이나 좋을 줄 알았는데 더위에 지쳐 그렇지가 않았다. 참깨는 터는 일보다 예쁘게 쑥쑥 자랄 때가 더 재미있었다. 불볕더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기세를 부려 숨이 컥컥 막혔다. 눈물인지 땀방울인지 계속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들깨나무그늘에 잠시 앉았다. 키가 크지도 않고 1미터쯤 자란 들깨가 그늘이 되어 등을 대고 앉으니 서늘하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주니 살 것 같았다.
씨앗 중에 제일 작은 겨자씨가 자라 새들이 찾아드는 나무가 되듯이, 들깨알맹이가 나무 그늘이 되어 그 옆에서 물도 마시고 지친 몸을 쉬어가라 이른다. 새참으로 가져온 쑥개떡도 먹었다. 우리 집의 별미인 쑥개떡은 쑥과 모시 잎으로 정성들여 만들어 참 맛이 있는데, 더위에 지친 탓으로 입안이 껄껄하였지만 배가 고파 그냥 먹었다. 그저 그늘을 제공한 들깨나무들이 고맙기 한량없었다.
그동안 세상을 살면서 오늘처럼 미처 생각지 못한 들깨나무에게 감사하듯이 어쩌면 내가 알게 모르게 무수히 스쳐 지나간 인연들에게서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작은 그늘이지만, 커다란 보리수나무 그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그 들깨의 그늘 아래서 잠시나마 돌아보고 있었다.
도저히 더 이상 이 뙤약볕 아래서 일을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렬히 내리쬐는 태양은 가는 팔월을 못내 아쉬워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사람도, 푸른 초원도 모두 태워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그만두면 오후부터 태풍이 온다는데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시집보낼 때 몸이 약하니 절대로 농사짓는 집으로는 보내지 않겠다고 했었다. 부모님은 이렇게 힘들게 농사를 지어 고소한 참기름을 짜 내 보따리 속에 슬그머니 넣어주셨다. 별로 힘든 줄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냥 받아먹었다. 부모님은 그 많은 농사를 지으며 칠남매를 키우고 가르치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풍이 온다는 하늘은 야속하리만치 흰 구름 한 조각 없는 푸른 바다 그대로였다. 푸른 바다에 유유히 떠있는 나룻배 한 조각, 그것은 낮에 나온 하얀 반달이었다. 조각배 안으로 내가 빨려들었다. 과거 현재 미래 속에 씨를 뿌리던 과거가 보였다. 또 저만치에서 가을이 손짓했다. 농사는 아무나 짓는가? 하얀 반달이 배시시 웃으며 내 마음을 다독여준다.
일어나야 되는데, 어서 일어나야지. 눈이 실실 감기려 했다. 들깨밭이랑에 주저 앉아, 이젠 그만 쉬고 일어서자. 참깨 10kg은 심을 때나 거둘 때나 나에게는 너무 벅찬 일이었다. 들깨의 그늘에서 참깨다발을 베고 그대로 누워, 저 하얀 조각배를 타고 끝없이 노를 저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0.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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