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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루에 서서/김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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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693회 작성일 10-08-17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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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루에 서서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길남 수필의 날 행사에 참석하려고 함양 땅을 찾았다. 일정표를 보니 첫 번째 방문지가 학사루였다. 그밖에 상림도 있고 안의의 광풍루와 박지원 선생의 유적, 허삼둘 가옥이 이어지지만 나는 학사루를 찾아가는 것이 큰 관심거리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것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좋고 편하다 해도 사람의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다. 바른 길을 걷지 않는 선비는 소인배라 하여 배척하였다. 조선 성종 연간에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관찰사 유자광이 함양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자광은 서출이었는데 이시애의 난에 공을 세워 발탁되었다. 예종 때는 남이(南怡) 장군을 모함하여 죽인 공로로 승승장구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종직이 소인배를 상전으로 모셔야 하는 형편에 놓였다. 그러자 이를 피해 이은대로 가버렸다. 뒤에 돌아와 학사루에 올라보니 유자광의 글이 붙어 있었다. 상놈의 작품이 고매하신 선비들의 현판 가운데에 걸릴 수 없다고 떼어 불 태워 버렸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앙심을 품은 유자광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관이 되어 사초를 잡은 성종의 실록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 이극돈과 짜고 모함하였다.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를 비난한 글이라고 연산군에게 고해 바쳤다. 선비들의 바른말을 싫어하던 연산군이 기회를 잡은 것이다. 많은 사림파 학자들이 화를 당했다. 이것이 무오사화다. 학사루는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곳이었다. 김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화에 화를 입은 사관 김일손은 나의 14대 할아버지다. 사장(詞章)에 능했고 올곧은 선비정신을 가졌던 분이다. 화를 당한 날 경북 청도 생가 앞의 냇물에 사흘간 핏물이 흘렀다 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그 내를 자계천(紫溪川)이라 부른다. 그 곳에 탁영 김일손을 모신 자계서원이 있다. 삼족을 멸하는 반역죄는 아니어서 형제는 화를 면했지만 전라도 남원으로 유배당했다. 아들이 없어 맏형님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삼아 후사를 맡게 했는데 나는 그 후손이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삶의 터전이 바뀐 것이 그 때문이었다. 학사루에 서서 옛날 우리 선조들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기본이요 형제간에 우애하며 살았다. 친구 사이에 의리를 지키고 이웃끼리 서로 도왔다. 재산을 모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살면서 고고한 정신을 지켰다. 불의는 절대 용납하는 일이 없었고 바른 길을 걸어왔다. 벼슬길에 오르는 것도 연연해 하지 않았다. 어떤 자리에 오르라고 임금이 부르면 소인이 어찌 그런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까 하고 사양하는 일이 더 많았다. 별수 없이 나간 자리도 오래 있지 않고 내 놓는 일이 많았다. 부모님이 병환이 나거나 상을 당하면 벼슬을 내어 놓고 낙향하여 효를 다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선비였다. 요즘은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는 사람이 많다. 유익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서슴지 않고 행하는 것을 본다. 돈을 버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별스런 술수를 다 부리기도 한다. 그러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그런 짓을 잘하는 사람을 유능한 사람이라 여기기도 한다. 유리한 쪽이라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선다. 그야말로 이익 챙기기 경쟁이다. 이렇게 살면서 어떻게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 있을까. 서로 어울려 오순도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문화가 발달한 요즘에도 옛날 같이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정신만은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가난했지만 서로 돕고 다정하게 살았다. 경쟁도 없었고 잘 다투지도 않았다. 이웃과 정이 오가고 조금만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담 너머로 주고받았다. 작은 오두막이지만 식구들이 모여 편히 잠자고 즐기며 살았다. 삼베와 무명베를 짜서 옷을 지어 입고 농사를 지어 먹고 살면 되었다. 행복지수로 따지면 그때가 훨씬 높을 것이다. 그런데 서양의 신문명이 들어오면서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마음의 바탕에 깔려있는 행복은 멀어져 갔다. 조선시대 선비정신이 내 마음을 흔든다. 올곧은 정신이 나를 붙잡는다. 우선 너라도 그 정신으로 살아가라 한다. 나도 속물이어서 어려울 텐데 말이다. 내가 함양에 살아 하루에 한 번씩 학사루에 온다면 혹시 모르겠다. 그때의 올곧은 정신이 나를 붙잡을지 모른다. 우리 조상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마음이 살아나려는지 모른다. 학사루를 떠나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 2010. 8.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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