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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 경쟁/정장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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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566회 작성일 10-07-29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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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 경쟁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정장영 격랑시대에 태어나 세풍(조국광복과 한국전쟁)에 휩쓸려 살다보니 내 뜻의 선택이라기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귀착한 곳이 교직(敎職)이었다. 지금과 같이 소질과 적성을 찾아 선택할 수 있는 사회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범학교를 졸업할 당시는 위대한 교육자 페스탈로찌의 꿈을 안고 출발했으나 크게 이바지하지 못하고 정년퇴임을 했다. 세상은 생존경쟁이듯 교직 역시 치열한 인위적 경쟁사회였다. 다행히 그것을 이겨내고 교감을 거쳐 교장으로서 일모작 인생을 마감할 수 있었으니 그건 행운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교직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돈도 권력도 없는 세상살이를 하겠다고 했으니 자본주의 세상을 예견 못하고 역행한 셈이다. 예로부터 명예를 가장 존중한다 했지만 누구나 권력가 아니면 재력가가 되기를 바랐던 게 아니던가? 뿌리 깊은 봉건적 사농공상(士農工商)사상이 퇴색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옛사람들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권력과 돈에는 관심을 갖지 못했다. 다시 말해 현대인으로서의 큰 야망을 갖지 못한 것이다. 교직을 명예직이라지만 이 세상은 대학교수를 제하고는 누가 명예롭게 보아주겠는가? 권력, 재력, 명예도 없는 직업이기에 정년만큼은 최고인 65세로 정해준 것 같았다. 그간 산업발전으로 교단을 떠나는 동료들을 수없이 보내야만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지금은 일반적인 직업으로 교직원노동조합까지 생겼다. 그나마 취업난으로 교직에 입문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지난날엔 삼무(三無)의 직장이라 가장 무력한 기관의 하나로 꼽혔다. 권력 없는 기관이니 인사문제가 한때 외부청탁에 편승하기도 하였고, 승진 전보는 으레 대문짝만한 명함(권력, 금력, 배경)에 농락당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도 겪었다. 발전해가는 세상은 그렇게 놓아 둘 수 없었던 모양이다. 기관의 독립성과 공정한 인사를 위해 외부 압력을 견제하려 궁여지책으로 만들어진 것이 소위 교직원인사(승진. 전보)규정이었다. 이 규정은 모든 영역을 평가항목으로 정해 수치로 통계 처리되었으니 교직(승진, 전보대상)에 자연 경쟁의 불이 붙게 되었다. 즉 ①경력(총 경력 및 직책) ②근무평정 ③연수성적(자격, 일반) ④근무지역(도서벽지, 기타, 특수학교), ⑤연구학교근무(문교부, 시도, 시군지정), ⑥개별연수(수업연구, 현장연구, 학습자료 출품, 과학 전시출품, 기타), ⑦포상(시군, 도, 중앙기관장, 대통령) 등을 모두 점수화했다. 또한 모든 점수는 1회 적용으로 재사용을 금지한 항목도 많았다. 규정이 있는 한 외부 청탁은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①에서 ③항목을 제외하고는 꾸준한 연수와 자기노력이 뒤따라야했고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했다. 다시 말해 점수관리를 잘해야 했고 경쟁가운데 가장 치열한 것은 평교사를 탈출하는 교감승진이었다. 한정된 자리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일단 교직에 입문한 이상 승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전입경쟁지인 도서벽지근무부터, 연구학교근무, 수업경진대회참가, 교육현장연구, 학습자료 제작, 포상 등이 치열한 경쟁의 대상이었다. 교직경쟁이 너무 치열해 한때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일부 교사가 본 업무를 소홀히 한 탓이었다. 어느 직장이나 승진제도에 부작용이 있게 마련이며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의 직장은 이 문제가 표출되지 않고 잘되어 간다. 그러나 교사들은 학급을 담임하기에 문제가 되곤 했다. 행여나 학급경영을 소홀히 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老婆心)이었다. 때문에 이를 꾀하는 교사들은 배전의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학급경영상의 실적 없이는 스스로의 입지를 지킬 수 없고 상사와 동료 간의 인정을 못 받기 때문이다. 경쟁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경험 한 토막은 수업경연대회다. 60~·70년대에는 교육에 관한 각종행사와 경연대회가 많아 경쟁이 매우 치열했었다. 각종 교육관련 대회는 각 시군 대회를 거쳐 도 대회에 입선되어야 중앙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경연대회는 학습지도에 지장이 없는 여름방학에 했다. 학습지도에는 왕도가 없다지만 교사는 수업기술이 으뜸이다. S군을 대표하여 도 대회 미술과 학습지도경연에 출연하게 되었다. 5인1조로 편성하여 첫날은 지도안(단원 전개안, 본시1~2차시 수업안)작성과 수업경연대상학급 면접으로 수업당일 사전준비지도를 위한 한 시간을 주었다. 당일은 2명의 교사가 1차시에 이어 릴레이식으로 2차시 수업을 전개하여 공개적으로 심사 평가를 받는 경연대회였다. 삼복의 폭서가운데 추진된 행사지만 구술 같은 땀방울을 흘리면서도 더위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정신력이었던 같았다. 교직원들의 경쟁이 너무 치열했으나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역기능도 많았다. 심지어 이를 빙자한 새로운 산업이랄까 사업이 생겼다. 현장교육연구 논문작성은 물론 학습자료 개발제작, 과학전시작품제작 등의 아이디어 제공에 수탁제작으로 빛을 보게 된 업소다. 세상사 모두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지 않았던가? 지난 일을 되돌아보니 당시(6~70년대)는 군사정권에 이어 유신정권이어서 가능했다. 의욕에 찬 담당자들의 일방적인 사업추진은 순 인위적인 경쟁이었다. 각 영역에 걸쳐 많은 연구와 실적을 가시적으로는 많이 올렸다. 그러나 실제 수업기술의 향상에 적용과 일반화에는 크게 미치지 못해 많은 예산과 행정력을 소비한 아쉬움이 남았다. 이제 모든 영역이 민주화되면서 비합리적이고 비능률적인 부문이 사라진지 오래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2010.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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