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칠순 잔치/임성호
페이지 정보

본문
행복한 칠순잔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임성호
화창한 4월 어느 봄날 초등학교 동창 H형의 칠순잔치가 부안 오륜가든에서 있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찾아가니 10시 30분, 현관엔 자녀들의 동창회나 근무하는 회사에서 가져온 화환이 즐비하고 밴드소리가 요란하였다.
7순이라면 가족끼리 조용히 여행이나 가는 게 보통인데 푸짐한 뷔페음식에 예술단원까지 초청한 것은, 살아 오는 동안 살림살이가 넉넉치 못해 친지나 치구들에게 변변한 술 한 잔 대접을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이런 잔치를 마련한 것이다. 손님이나 주인이나 모두가 흐믓한 자리였다.
동창이라지만 그 분은 나보다 대여섯살 위다. 살기가 고달팠던 5,60년대에는 형이나 누나 또는 동생이 같은 학년에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이로 보면 초등학교 6학년에서 고등학교 1,2학년까지 한 교실에서 같은 내용의 공부를 하는 예는 많았다. 더구나 H형은 가정형편 때문에 철이 일찍 났다. 우리같은 조무래기들이 어느 중학교에 가야할지 고민할 때, 그를 기다린 것은 깔구럭이나 지게였다. 공부보다 우선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일이 더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친구들을 부려워 하지않고 가난을 숙명처럼 가슴에 안고 순리대로 살았다. 17, 8살 무렵 누구나 가는 군대에 일찍 다녀 올 생각으로 그 당시 어린 나이에 군기가 세다는 해병대에 지원했다. 당시는 해병대에 지원 했다는 것만으로도 으스대며 평소 좋지않은 친구들에게 해꼬지나 하고 다니던 때였다. 그렇지만 그는 해병에 입대하여 조용히 군무를 마치고 만기 제대를 하였다. 그는 해병대 갔다온 사람 답지 않게 군자같은 태도로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여 농사 일을 도우며, 결혼도 일찍하여 아들 4형제를 두었다. 가난한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아서 아이들을 상급학교에 진학시키지도 못하였다. 아들 4형제는 하나둘씩 서울로 떠났다. 큰아들이 자리 잡으면 둘째가, 그 다은엔 섯째가 서울로 갔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아들 넷이 탄탄한 직장을 잡았다. 집을 사달라, 결혼비용을 달라 부모를 조르지 않고 저희들끼리 알맞은 상대를 골라 모두 결혼하여 식구가 열로 불어 났다. 지금은 손자가 열셋이라 도합 스물 세 명의 대가족을 이루었다. 식구가 1개 소대를 이룰 날도 멀지않았다. 이는 우리나라 인구정책과도 꼭 맞아떨어진다. 가끔 동창회 때면 자녀 하나 성혼을 시키지 못한 친구에게 "자네 손자 하나나 두었나? 에헴." 하고 없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기곤 한다.
가끔 선녀같은 차림의 연예인들이 창과 춤으로 분위기를 띄우고, 며느리와 아들들의 짝궁춤과 노래가 흥을 북돋았다. 귀여운 손자손녀들이 손님들 사이를 신이나서 뛰어 다녔다. 그가 베푼 오늘의 칠순잔치는 임금님이 마련한 잔치 같았다. 지금 H형은 25,000여 평의 논 밭을 짓는 부자가 되었다. 낚시꾼이 한 자리에서 계속 떡밥을 떨어 뜨려야 물고기가 많이 몰리듯 한 구덩이를 깊게 파야 물이 고이는 법이다. 더구나 농사는 정년도 없지 않은가? 지난날의 가난을 떨처버리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H형에게 한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같이 한 시대를 살아도 부모형제가 넉넉하여 젊은 시절 철없이 살다 가산을 탕진한 사람에 비해 온갖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며 산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2배의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만큼 인간성도 풍부해진다고 본다. 부디 H형의 여생이 누구보다 더 즐겁고 건강하기를 바라며 밴드소리를 뒤로하고 화려한 연회장을 나왔다. 전주까지 오는 동안 차도 기분이 좋은지 다른 때보다 더 부드럽게 잘 나가는 것 같았다.
(2010.4.26.)
- 이전글꼭 필요한 사람/박인경 10.04.27
- 다음글태훈이 결혼식/임종우 10.04.2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