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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주고 30% 받는 사랑/이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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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673회 작성일 10-03-2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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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주고 30% 받는 사랑 전주안골노인 복지회관 수필창작반 石河 이 신 구 오늘이 예순아홉 번째 맞는 내 생일이다. 마음은 ‘아직’인데 나이의 숫자만 늘어가니 이를 어쩌랴? 그래도 귀빠진 날이라고 아이들이 평소 자주 먹어보지 못한 색다른 음식을 대접한다기에 우선 식구끼리 한 끼 하고, 또 식권도 주기에 나이 들면 그래도 친구가 좋다고 가까운 친구들 몇을 불러 같이 식사를 했다. 빨리 가는 세월과 어려웠던 옛날 이야기 그리고 먼저 간 친구들 이야기가 나왔다. 그 중에서도 동요작곡의 천재요, 동요 동시 창작의 대가였던 P군과, 음악(기악)과 미술분야에서 발군의 인재였던 T군, 두 친구의 기일이 이때쯤이라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고, 그들의 천재성과 겪어온 처지를 안타까워하였다. 6․25 직후 우리 친구들 거의가 그랬듯이 그들도 가난에 쪼들리며 장학금으로 어렵게 학교를 졸업했다. P군과 내가 재학시절부터 자주 만났었던 것은 우리 집 근처에서 그의 자형(姉兄)이 사진관을 경영하였기에 경제적 도움도 받고, 뵙고 싶을 때 틈만 나면 방문길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뒤에도 친구들 모임과 시화전 및 그를 아끼는 모임에 끼어 막걸리 파티를 자주하였다. 성격이 서민적이면서도 순수하고 털털하여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술을 좋아해서 ‘한잔 술’ ‘항상 술’ ‘노상 술’ 등 ‘술’자 별호가 많았다. 학생시절 잠재된 재능이 교직생활에서 날개를 펴면서 동요, 동시, 작곡 등에 수월성을 발휘해 흰 종이에 끄적이면, 어깨춤이 절로 나는 동요 가사가 되고, 오선지에 그으면 불후의 동요가 작곡되어, 20대초에 이미 방송국, 일간지 및 문예지에 그의 이름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인구증가로 우후죽순처럼 문을 여는 학교가 많아 전국적으로 300여 개 학교의 교가를 의뢰받아 작사, 작곡을 해주는 등 봉사하였고. 전국 규모의 각종 동요작곡, 동요 부르기 대회를 휩쓸었으며, 수상 경력도 많았다. 따라서 그 명성에 걸맞게 각 학교에서 모셔가려 애를 썼다. 또 주위애서 눈독 들이는 일등 신랑감이어서 당시 명문가의 규수와 결혼을 했다. T군은 학창시절부터 학구열이 높고 성격이 화끈하여 적극적인 줄 알았는데 현직에서 가까이 있으면서 그의 재능을 빌리고자 접촉해 보니 그의 여린 마음과 내부에 잠재된 말 못할 가정사 때문이었는지,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적응력이 다소 부족한 성격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음악에 천부적 재능이 있어 각종 악기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 어떤 악기든 불고 두드리면 아름다운 멜로디를 구사했다. 미술에도 천부적 재능이 있어 붓을 들어 그리면 예술적인 작품이 완성되어,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재간을 남에게 선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한때 전국적 행사의 지휘자로 부름을 받아 이름을 날리고, 그 재주를 인정받아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 커플로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 행복과 영광, 그리고 부러움은 그들의 결혼 후반기에 찾아들었다. P군과 T군 모두 그의 집안일이나 개인적인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다음 이야기는 P군이 영면하기 2년 전, 명예퇴임을 하고나서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기간제 교사로서 같이 근무하면서 막걸리에 취해 마음속 한을 허심탄회하게 풀어 놓았다. T군은 행사 유공자로 표창을 받고 해외여행을 한 뒤 갑자기 뇌졸중으로 생을 마감했다. 변을 당하기 1년 전쯤 내 부탁으로 학습자료 스케치를 마치고 같이 식사하던 자리에서 그의 불우한 삶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 어울리던 친구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보강했다. 최근에는 시대가 변해서인지, 그때 그들의 상황을 보고 듣기 어렵기에 더욱 생각이 난다. 그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깊은 개인적인 사연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서로의 환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격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여 불행한 결말을 맞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법정스님의 주례사가 문득 생각났다. 스님은 축하 말보다, ‘삶에서 너무 많이 갖고자하는 욕심을 버리고, 꼭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가지는 게 행복하다’는 훈계로 일관한 주례사였다. (전략)---결혼할 때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 돕고 살겠다고 맹세해 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란 탓을 하며 못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렇게 인생이 괴로움 속에서 돌고 도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그 이유를 말할 테니 두 분은 이런 사람(賀客)들처럼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 이렇게 좋아서 결혼하는데 결혼할 때는 선도 많이 보고 사귀기도 하면서 ‘저 사람이 돈은 얼마나 있나, 학벌은, 지위는, 성격은, 건강은?’ 이렇게 다 따져 가지고 이리저리 고르는 데, 그 근본 심보는 덕을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이 각기 30% 주고 70% 받고자하는 마음이 무너지면 성격차이네, 궁합이 안 맞네, 잘못 선택했네 하며 엉뚱한 핑계로 불화를 돋우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원앙은 꼭‘손해 보는 것이 남는 것이고, 내가 당신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겠다'고 다짐하면서 상대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다하여 희생과 봉사로 대한다면 백년해로하는 사랑하는 부부가 되고, 자랑스런 자녀를 둔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이라 확신합니다. (후략) 1960년대 후반 P군과 T군 모두 파랑새의 꿈과 무지개 같은 부푼 희망을 지닌 꽃같은 사모님을 모시고 시댁을 방문하면서부터 출발의 단추가 잘못 끼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호남의 넓은 들판 개울가 뗏집 속에서 가마니를 들추고 맞이하는, 초라한 늙은 시부모를 보고 아찔했고, 집도 절도 친척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시댁 식구들에게서 크게 낙담하고 실망했으며, 시도 때도 없이 손을 내미는 생활비를 보태야 하는 박봉생활……, 부유하고 귀한 집 외동딸로 자라온 규수들은, 그래도 몇 년 동안 신혼의 단꿈에 시간가는 줄 몰랐으나 애를 낳고 가정을 꾸려가다 보니, 세월이 지날수록 만남을 후회하고 탓하는 아내의 태도에 고민, 갈등 그리고 불화가 인생을 자포자기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많이 배우고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며느리, 상냥하고 귀엽고 기쁨만 안겨줄 며느리인 줄 알았더니, 찌푸린 인상에 말을 걸어도 대답도 않는 볼멘 말투, 어딘지 피하려고만 하는 태도에, 시댁 식구들은 당황했고, 새댁은 결혼 전 시댁의 어려움에 대해 이미 들은 바는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하였으며, 문화적 경제적 경이 너무나 달랐던 새댁들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남편들을 이해하거나 측은하게 생각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해가 갈수록 시댁에 대한 관심은 멀어지고, 말도 내지 못하게 하였다. 웬만한 일에도 신경질적으로 과민반응하며 짜증을 내고, 그 수준을 이해하지 못하며 입는 것, 먹을거리, 삶의 방식 등 서로의 생활과 생각까지도 어긋나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시부모의 꾸중은 신랑을 좌불안석으로 만들었고,새댁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단다. 그 여파로 남편까지 무시하려 는 데는 남자의 자존심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가정이 재미 고 가장의 권위가 발밑에 깔렸으니, 아내가 보기 무서워지고,자식들에게 부끄러워 즐거워야 할 가정이 잠자러 가는 하숙집만도 못했다는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없어 퇴근길은 항상 술타령, 신세타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니, 남의 같지 않았다. 남편의 월급은 쥐꼬라만한데 고급과 풍요만을 추구하는 아내는 활습성을 고치지 못하고 불평만 늘어놓으니 이를 어쩔 것인가? 그렇다고 처가 어른께 하소연하면 철이 없어 잘 못 가르친 죄라며 그때마다 작은 경제적 도움을 주며 달랬다. 그러다 몇 달은 매듭이 잘 풀리는가 했으나 또다시 경색되기 시작하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결혼은 결국 파경으로 끌났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하며 살아온 지 20년, 세상은 변해도 여자의 마음은 변하지 않더란다. 환경이 성격도 바꾸어 놓는 것일까? 오랫동안의 짜증이 인간미까지 변화시켜 직장에서도 ‘재주는 있는데 원래의 너는 어디로 보냈느냐, 사람이 달라졌다’는 핀잔을 들으며, 애꿎은 술타령에 사회적 지진아가 되었다. 친구들은 하나둘 승진하는데 이젠 자존심만으로 버티기도 힘들게 되자 명예퇴임을 하고 여기저기 알아주는 곳에서 기간제나 계약직으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그때 그 친구들에게 '어찌 너 하나만의 일이겠느냐? 우리 시대, 우리들이 다 겪는 일이지만 모두 현명한 해결방법을 탐색하고, 희생하는 마음으로 참고, 이겨내야 한다. 너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위로를 했다. 작년 오늘 내 생일날, 아들 친구의 결혼 주례를 했는데 요즘 삐꺽한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만나야겠다 고 다짐하면서, 그들의 결혼식에 법정스님이 주례를 맡아서 그 주례사를 들려주었더라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스님은 주례사에서 결혼하는 모든 선남선녀가 ‘70% 주고 30% 받는 사랑’을 강조하셨다. ‘서로가 덕을 보려 말고, 서로가 먼저 베푸는 희생봉사정신이 깔린 사랑의 만남, 즉 그런 사랑,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 들이 일찍 떠난 것도 운명이겠거니 하면서도 둘 다 갑자기 심혈관질환으로 가게 된 데는 쌓인 스트레스와 참지 못한 충격의 소산이 아니었나 싶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라는 진리 속에서, 이젠 너의 아픔을 내가 감싸주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곳에서, 그 재능을 힘껏 펼치기를 바란다. ( 2009.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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