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을 거닐며/한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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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거닐며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한일신
연말이라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해서일까. 일찍 잠이 깨어서 그런지 몸이 찌부둥했다. 시계를 보며 일어날까 말까 뭉그적거리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창밖을 보니 밤새 눈이 내려 하얀 이불을 덮은 앞산이 나에게 어서 나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집을 나섰다. 세상은 온통 눈꽃으로 눈이 부셨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한 쪽 발을 푹 넣어보니 꽤 깊게 들어갔다. 15cm 이상 되는 것 같았다. 주차장의 자동차들은 아직 한밤중인 양 하얀 솜이불을 덮고 있었다. 인도와 자전거도로가 구분이 없는 길을 뽀드득뽀드득 발자국을 찍으며 상념에 젖어 걸었다.
직장에 다닐 때의 일이다. 겨울이면 토요일에 전주에 나왔다가 일요일에 직장이 있는 진안으로 들어갔다. 월요일 날 가고 싶어도 도로사정이 안 좋으면 버스가 결행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어느 일요일 아침 전주에서 관촌으로 갔다. 다시 이곳에서 진안행 외궁 버스를 바꿔 타야 하는데 버스가 아예 안 다닌다는 거였다. 나는 할 수 없이 걷기로 마음먹고 30리 길을 나섰다.
누구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순백의 산길, 가도 가도 그 길이 그길 같았다. 눈길 걷기가 이리도 팍팍한 줄을나는 미처 몰랐다. 자꾸만 무거워지는 다리에 힘을 주며 한참을 가고 있는데 뒤에서 경적소리가 울렸다. 한쪽으로 비켜서도 계속 울렸다. 웬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더니 차를 세우며 나보고 타라고 했다.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조수석에 탄 부인까지 타라고 권유하여 못이기는 척 타고 말았다.
약간은 불안하여 숨을 죽인 채 마음을 졸이며 한 20여 분쯤 지났을 때 우리 마을 입구에 무사히 내려 주었다. 남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이 남을 사랑 할 줄도 알고, 도움을 받아본 사람이 남을 도와줄 줄을 안다고 했던가. 그때 어찌나 고맙던지 오늘 아침 눈길을 걷노라니 그날 그분들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하루는 통근버스가 재를 넘어갈 때였다. 기사님은 길이 얼어 도저히 못 가겠다며 전부 내려서 걸어가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눈길을 걸어가면서 기사님의 안전을 빌며 버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기사님은 다행히도 빙판길 재를 비틀거리며 아슬아슬하게 잘 넘어왔다. 이에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손뼉을 치자 기사님은 마치 개선장군처럼 손을 들어 화답하며 우리를 목적지까지 무사히 태워다 주었다.
지난날을 회상해보면 겨울철 눈은 빙판으로 이어져 교통을 방해하거나 죽음까지도 불러오기에 내겐 항상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 때문에 퇴근도 못하고 식사를 거르며 사무실 한쪽에서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워야 했던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젠 나를 구속하는 것들에게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내 뜻과 의지대로 살 수 있으니 말이다. 두꺼운 외투로 무장하고 눈길을 나서면 천지가 다 나를 반긴다.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대로 모두 다 자기 몫의 무게를 이고 있다. 큰 나무 밑에 숨어있는 꼬마 녀석들은 큰 나무가 바람막이라도 되어줄 법도 하련만 그들조차 눈을 이고 있는 걸 보면 세상은 정녕 공평한 게 아닐까? 바람에 눈이 날려 얼굴을 때렸다. 따가움을 느끼며 문득 김동명 시인(金東鳴 1990-1968)의 시 백설부(白雪賦)의 몇 구절을 떠올렸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날린다./ 눈이 쌓인다.// 눈 속에 태고가 있다./ 눈 속에 오막살이가 있다./ 눈 속에 어린 시절이 있다.// 눈을 맞으며 걷고 싶다./ 눈을 맞으며 날이 저물고 싶다./ 눈을 맞으며 주막에 들 고 싶다.//
<이하생략>
눈길을 거닐며 이 시를 읊조리니 마음은 어느덧 동심으로 돌아간 듯했다. 소꿉친구들과 눈사람도 만들고 싶고, 눈 위에 누워 눈 사진도 찍어보고 싶다. 눈썰매를 타고 싶기도 하고. 그러다 지치면 휘날리는 눈을 맞으며 저물도록 눈길을 걷고도 싶다. 이 아침에 세상을 온통 하얀 눈으로 덮어버리듯 나도 내 삶에 찌든 때와 허물을 다 지워버리고 싶다. 그 빈자리를 순수한 마음과 아름다운 사랑으로 채워 오래도록 기억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09.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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