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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산을 넘어 지금은/양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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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593회 작성일 10-01-03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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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산을 넘어 지금은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양희선 모르는 사람과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는데, 부부의 인연이란 하느님께서 짝 지워 주신 천생연분이 아닐까. 꿈처럼 아름다운 삶은 아닐지라도 맺어진 인연이기에 한 둥지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동고동락하는 사이다. 우리 부부는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오다 보니 어언 50년이 넘었다. 사시사철 궂은 날과 맑은 날, 희로애락을 함께 하면서 칼로 물베기를 수도없이 하였으리라. 나는 1958년 12월 9일 5남 1녀의 장남과 중매로 결혼을 하였다. 해병장교로 용맹스럽던 남편은 결혼을 앞두고 제대를 하였다. 그때 시아버님께서는 고위직 공무원으로 계셨다. 뜻밖에도 공장에 큰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청렴하기로 소문난 아버님께서는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스스로 새표를 내셨다. 시동생들 셋이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시누이는 여중생이며, 막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시아버님의 갑작스런 실직으로 식구들의 생계를 남편이 도맡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남편은 서둘러 일자리를 구하여 전매청전주창 기계과에 근무하게 되었다. 시어머님께서 살림을 맡아 하셨기 때문에 새색시인 나는 시어머님께서 시키는 일을 할 뿐이었다. 시어머님께서는 쌀 1가마를 팔고, 연탄 몇 백장 들여놓으라고 하셨다. 그 시절엔 타회사에 비해 공무원 봉급이 제일 박했으며 보너스란 이름조차 없었다. 대신 밀가루를 한 포대씩 배급을 주어서 저녁에는 수제비를 신물나게 먹기도 했었다. 더 큰 문제는 서울에서 공부하는 시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 마련이었다. 시부모님께서는 살던 큰집을 팔고 옹색한 집으로 이사를 했다. 커가는 아이들은 할머니와 함께 한 방에서 지냈다. 아이들 셋은 불평이나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어머님께서는 집까지 팔고도 어려움이 남았는지 사조직인 돈계를 들었다고 하시며 남편에게 매달 계금을 내줄 것을 당부하셨다. 나는 아직 계가 무엇인지조차 모를 때였다. 또한 액수가 적은 것도 아니고 전체봉급의 25% 정도를 내야한다니 큰 걱정이었다. 그때 한 달 봉급이 10.000원 정도였다. 우리 부부는 속이 상해서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형편이 그러니 어찌할 수도 없고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2년이란 세월이 곤곤(困困)하게 흘러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어머님께선 현명하시고 선견지명이 있는 지혜로운 분이셨다. 자식교육열이 대단하신 신여성으로 멋쟁이셨다. 그때 어렵다고 주저앉아 가난만 탓하였다면 오늘날 무지의 역경에서 헤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재물은 많을 때도 있고,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며, 사는 집이야 나중에 때가 되면 더 좋은 집을 마련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격형성의 지식은 사고 파는 것이 아니며 저절로 앎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기에 고생은 많았어도 후회는 없다. 고난을 인내로 극복하여 둘째시동생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여 은행원으로, 셋째는 서울대학교를 나와 대한중석으로, 넷째는 서울시립대를 나와 공무원이 되었다. 모두가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고생을 많이 하였다. 시동생들의 일이 마무리되어 가니 우리 아이들이 컸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는 가만히 손을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때마침 전매청에서 사원모집 공고가 났다. 나는 망설임도 없이 원서를 내고 예상문제지를 구입하여 공부를 했다. 엽연초와 담배에 관한 문제 들이었다. 직장에 취직하기란 예나 지금이나 어렵긴 마찬가지로 몇 십대 일의 경쟁을 뚫고 합격하였다. 아이 셋을 낳은 엄마가 어린 젖먹이를 떼어놓고 직장에 나가 일을 한다는 것은 정말 못할 일이었다. 셋째가 돌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젖먹이 어린애를 수유시간에 맞추어 아이를 데리고 올 사람이 없어 애간장을 태우던 날이 허다했다. 엄마의 품에 안겨 눈을 맞추며 재롱을 부리는 아들을 떼어 보내고 안쓰러워 아린 가슴을 눈물로 달래야 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우유가 흔하지 않아 엄마들은 모유로 아이를 키웠다. 그 뒤 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입사한지 만 5년만에 담배제조품 수량을 기록하는 기록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 1인3역을 하면서 직장에 나간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말단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남편은 가족들의 생계를 어깨에 메고 밤늦도록 기계설계도를 그리며 근면성실하게 일을 하였다. 부지런한 남편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운동으로 체력을 단련시켰다. 몸이 건강해야 많은 식구들을 부양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어김없이 새벽이면 눈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아침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남편은 급하고 굽힐 줄 모르는 고지식한 성격이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궂은 일에 솔선수범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안다. 부모를 대신하여 형으로서 해야 할 책임감과 의무를 성의껏 했다해도 아우들은 어느 한구석에는 섭섭한 마음이 남아 있었으리라. 형제간의 우애는 웃 사람의 포용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통스런 역경도 희망이라는 끈을 놓지 않고 인내한다면 언젠가는 그 고통이 기쁨이 되어 보람으로 돌아올 것이다. 행복이란 감사한 마음을 가졌을 때 오는 것이며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인 것이다. 인생 출발점에서 겪은 고난의 산을 넘어 지금은 푸른 초원에서 한가롭게 걷고있다. 앞만 보고 열심히 걸어온 길을 이젠 뒤돌아보며 차근차근 챙기면서 후회없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 (2009.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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