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문단야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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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단야사>⓶
불광불급(不狂不及) 전문 수필가, 三溪 김학
박 동 수
수필가 김학 선생은 생활 자체가 수필이다.무엇이든지 미치지 않고는 이르지 못하는 것인데 김학 선생은 수필에 미치다시피 천착해왔다. 그래서 수필로 일가를 이룬 분이고 수필로 참 행복하게 사는 분이다. 핸드폰 컬러링도 ‘나는 행복합니다.’를 사용하고 있다. 김학 선생은 박사골로 유명한 임실군 삼계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순진무구하게 중학교까지 마치고 고등학교 때 전주로 나왔다. 전주에 나온 김학 선생은 최승범 교수와 사촌인 내종사촌형이 최승범 교수 댁에서 하숙을 하고 있어서 그곳에 자주 드나들면서 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필메카의 초석을 놓다
전북은 한국에서 가장 수필가들이 많고 수필이 활성화된 곳이다. 그래서 전북은 자타가 인정하는 수필의 메카이다. 그 수필메카의 초석을 놓은 분이 김학 선생이기도 하다. 서해방송PD 시절, 1970년 밤의 여로를 맡아서 2년 반 동안 매일 수필 한 편씩을 써서 방송하다가 그 뒤 전북의 문인들에게 청탁해서 방송을 했고, 1978년 송년모임에서 김학 선생이 산파역할을 해서 전북수필문학회를 창립하기로 하고 1979년 10월 전북수필문학회를 창립했고,『전북수필』창간호가 발간되었다. 그렇게 해서 전북에 최초의 수필문학회와 수필전문지가 탄생했다. 전북수필은 벌써 39년째이고 85집까지 발간되었으며, 회원은 150명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전북수필』이 크게 발전하는 데도 김학 선생의 역할이 아주 컸다. 전북수필문학회 2대 회장을 맡아서는 『전북수필』을 크게 활성화시켰고, 전북수필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김학 선생은 수필이 생활이어서 수필집 발간도 아주 많이 했다.
<수필아, 고맙다>, <쌈지에서 지갑까지> 등 14권의 수필집을 발간하였고, <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 등 수필평론집 2권도 출간했다. 다수의 문학상도 수상했다. PEN문학상, 제1회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신곡문학상 대상, 전북문학상, 전주시예술상, 전라북도문화상, 목정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김학 선생은 1980년 월간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여 중앙에서도 활동을 많이 했다. 월간문학 출신 수필가들의 모임인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월간문학 등에 전북이 수필의 메카라는 글을 발표하는 등 전북수필의 위상을 전국에 전파시켰다.
*수필 확산의 길라잡이
김학 선생은 많은 사람들을 부추겨 수필활동을 하도록 이끌었다. 후배들에게 월간문학에 등단하도록 권유하여 많은 사람들이 등단하도록 하였으며, 전북수필에 글을 쓰도록 많은 사람들을 회원으로 안내하기도 했다.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서해방송과 KBS가 통합되어 KBS로 자리를 옮겨서는 남원, 군산, 전주KBS에서 근무하면서 많은 수필가들을 문학프로그램에 출연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필확산의 큰 획을 긋기 시작한 것은 KBS를 정년한 2001년 9월부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전담교수를 맡으면서 부터이다. 70세까지
전북대에서 수필창작을 지도하면서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행촌수필문학회를 창립토록 하여 <행촌수필> 32호가 출간되었고, 이어서 2008년에는 안골노인복지관, 2011년에는 꽃밭정이노인복지관, 2015년에는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반을 지도하면서 문하생 210여명을 수필가로 배출했고, 신춘문예에 5명(전북일보 김재희/ 전북도민일보 정원정, 정성려/ 경남신문 이주리/ 동양일보 이은재), 각종 각종문학상(목포문학상: 정원정, 조윤수/ 토
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박일천) 등 130여 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아주 행복한 해불양수(海不讓水)의 수필가
바닷물은 모든 물을 받아들인다. 김학 선생은 누구와도 관계가 좋다. 모가 나지 않는다. 마음도 넓어서 늘 행복하게 산다. 그래서 수필을 좋아하는 문우들을 만나면 술집 행이었다. 단골집은 많았지만 호주머니 사정에 따라 단골집을 선정했다. 용돈이 넉넉하면 <장카페>를 찾았고, 그렇지 않으면 가맥집인 <영광상회>로 가서 북어를 안주로 병맥주를 마셨다. 영광상회에 가면 신문과 방송기자들 그리고 도청직원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또 호주머니가 가난한 날은 공보관 근처 골목 안에 있던 대폿집 <정읍집>으로 갔다. 그 <정읍집>은 약속하지 않고 가도 문인이나 화가, 서예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서로 잔을 주고받아도 막걸리를 마시는 집이어서 부담이 되지 않았다.
노래방도 참 많이 갔었다. 술집 순례 끝에는 으레 노래방에 들러 저마다 애창곡을 불렀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다. 정덕룡 회장이었다. 노래 한 곡 부른 적이 없었다. 술만 꾸역꾸역 마셨다. 소주, 막걸리, 맥주 가리지 않았다. 글 쓰는 사람들은 주로 전주 중앙동에서 놀았다. 그것도 일종의 자부심이었다. 그때 즐겨 찾았던 술집 중에 <이화집>을 빼놓을 수 없다. 예쁘장한 주모의 눈웃음에 끌려 단골이 된 저명인사들이 많았다. 이화여대를 나왔다는 소문이 돌아서 더 찾았을 것이다. 정덕룡 선배는 그 술꾼들을 소재로 <행여나 부대>란 수필을 쓰기도 했었다. 김학 선생은 그 때가 살맛나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해양불수의 마음을 가진 김학 선생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지원을 많이 받기도 했다. 전북문협회장을 역임하고 다음 회장에게 인계해 줄 때는 9백만 원의 거금을 넘겨주었고, KBS전주방송총국 편성부장 때는 현대자동차에서 4천만 원의 협찬을 받아서 <전북의 어른상>을 만들어 시상하기도 했다. 김학 선생은 전북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ROTC중위로 예편, 해성고등학교에서 한 학기 교사를 하다가 방송으로 자리를 옮겨 58세에 정년퇴직을 했고, 이어서 전북대 평생교육원을 시작으로 쭉 수필창작을 지도했다. 수필창작 지도가 제2의 직업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일생을 수필로 사는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김학 선생은 유영금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유영금 여사는 초등학교 교사시절 김학 선생과 결혼했는데, 김학 선생은 인생에서 가장 잘 선택한 일이 유영금 여사를 만난 것이라고 자랑한다, 특히 전주사범병설중, 전주여고, 전주교대를 나와서 머리가 아주 좋다고 자랑도 많이 했다. 큰아들 정수는 LGU+ 부장, 작은 아들 창수는 미국 카네기멜론대학 전자공학박사로 퀄컴사에서 근무하고 있고, 딸 선경은 서울 광운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몇 년 전에 미국에 갔을 때 작은며느리가 술을 끊으라고 해서 바로 술을 끊었다고도 한다. 그 때 며느리가 사준 오렌지색 운동화를 늘 신고 다니면서 지금도 운동을 한다.
김학 선생은 오늘도 새벽에 문하생들이 보내온 수필원고를 첨삭해서 다시 보내주면서 아주 행복한 하루를 시작한다. 김학 선생은 메일도 잘 하고, 페이스북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으며, 개인 불로그, 카페, 전자문학관도서관을 가지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아주 잘 적응해가는 수필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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