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IS MOBILE PAGE (~767)
WEBIS TABLET PAGE (768~991)
WEBIS DESKTOP PAGE (992~1279)
WEBIS BIG DESKTOP PAGE (1280~)

한국의 명물, 안골 합죽선/김학철 > 자유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서브비주얼

도전하는 노인, 함께하는 안골!

  • HOME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 HOME
  • 자유게시판

한국의 명물, 안골 합죽선/김학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633회 작성일 12-10-03 06:13

본문

한국의 명물, 안골 합죽선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학 철 예로부터 전주하면 부채가 유명했다. 부채는 크게 나누면 두 가지다. 접부채인 ‘합죽선’(合竹扇)과 둥근 방구부채인 ‘태극선’(太極扇)이다.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졌다는 부채는 합죽선의 경우 산수화(山水畵) 또는 ‘매란국죽’(梅蘭菊竹)인 사군자(四君子) 등이 그려지는데 조선시대는 주로 양반들과 선비, 해방 후에는 돈깨나 있고 밥술이나 먹는 부자들의 애용물이 되었다. 이에 반해 태극선은 주로 서민들이 사용하였다. 합죽선은 단순히 무더운 여름철에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흰 모시옷을 입고 점잖게 앉아서 자신의 수염을 연신 쓰다듬으며 오른손으로는 합죽선을 부쳐댐으로써 자신의 신분과 부귀를 은근히 과시하는가 하면, 아랫사람에게 무슨 지시를 하거나 또는 질책을 할 경우, 그리고 자녀들을 훈육할 때 지휘봉 또는 훈육봉 구실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단연 국악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무대에 올라가 시조가락이나 판소리를 할 때면 반드시 한복을 입고 오른손에는 합죽선을 들어 극적 순간이나 환희로운 대목이 나올 때 으레 그것을 활짝 편다든지 또는 치켜들고 올렸다 내렸다하는 등 감정의 기복을 나타낼 때마다 요긴하게 사용된다. 그런데 전주 인후동 안골에는 해방 후부터 합죽선을 만드는 집이 2가구 있었으니, 문준화 씨와 권하중 씨가 그들이다. 그 뒤 같은 동네사람인 배귀남 씨, 김진옥 씨, 김동식 씨, 유홍순 씨, 김성문 씨 등이 그 두 분한테서 어깨너머로 배워 각각 기술을 습득하였다. 내가 꼬마둥이 때부터 이들 집에 가면 전남 구레에서 사왔다는 대나무가 마당 한구석과 마루 밑 토방에 수북수북 쌓여있었다. 마루부터 안방까지는 대나무 껍질과 각종도구 그리고 큰 고목나무 아랫부분을 잘라낸 밑동이 있는데 이 밑동에는 움푹움푹 칼자국이 어지럽게 많이 있었다. 도구로는 톱, 낫, 칼, 송곳, 인두 등이 있고 칼의 경우 넓은 장도리 칼부터 중간 칼, 작은칼 그리고 네모난 쇠막대기의 뾰족한 끝부분에 칼날이 달려있는데 큰 것, 중간 것, 작은 것 등 종류도 많았다. 온통 집안이 이런 물건들로 어수선하게 널려있었다. 이들 7가구는 가내수공업으로 분업화를 시도하여, 한 가구는 ‘골선방’ 이라 하여 대나무 겉대작업을 하는데 대의 속을 칼로 도려내면 부챗살이 되는 바 이 속 살대를 2개씩 민어부레를 삶은 아교풀로 붙이는 작업을 하였다. 이래서 합죽(合竹)이라는 말이 나왔다. 또 변죽용대는 대나무뿌리로 만들고 손잡이 끝부분은 소(한우) 무릎 뼈를 깎아 붙였다. 그래서 그런지 마루 한쪽 구석에는 하얀 소 무릎 뼈가 한 무더기씩 쌓여있었다. 또 어떤 집은 ‘낙죽방’이라 하여 변죽과 살대에 인두로 무늬를 새기는데 인두를 화롯불에 달궈 박쥐, 매화, 국화를 그려 넣는 담금질을 했다. 또 ‘광방’이라 하여 낙죽작업을 마친 살대를 매끄럽게 만드는 작업을 말하는데 곱지 않은 부분을 칼로 깎아내고 거친 부분은 끌과 페이퍼로 갈고 닦아서 반질반질하게 광을 냈다. 또 어떤 집은 부채의 고리를 사북이라고 하는데 장석과 고리를 붙이는 작업을 말한다. ‘도배방’은 살대에 한지를 붙이는 작업으로 주로 완주군 소양면에서 나오는 ‘송강지’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림은 합죽살에 붙이기 전 미리 환쟁이(화가)한테 가서 그림을 그려와 붙였다. 이처럼 크게 나누어 5단계의 작업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합죽선 한 자루를 완성하기까지는 무려 수십 번의 손이 가고, 시간도 100일 이상 걸린다고 했다. 연간 1,500에서 2,000자루의 합죽선을 만들어 전주시내에 있는 물주(자본주)에게 납품하면 물주는 서울, 부산 등 대도시 백화점 또는 민속촌 등에 팔았다. 이곳 안골의 7가구는 온 식구가 총동원 되다시피 하여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작업을 하였으며, 물주가 주는 작업량에 따른 수공료를 받아 겨우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1950년대 말에는 왕년의 톱스타 여배우 최은희 씨와 유명 국악인 박동진, 박초월 씨 등이 안골마을로 직접 찾아와 당시로는 고가인 쌀 두 가마 값을 지불하고 합죽선을 하나씩 구입해 가기도 했었다. 이들 7명은 각자 자기 가족들과 함께 해방 후 30여 년 동안 합죽선 만들기 명맥을 유지해온 분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이름 없는 명인들인 셈이다. 그러나 그 뒤 들어온 선풍기, 에어컨 등에 밀려 서서히 사양길로 접어들고, 이들도 고령으로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니 막내격인 김성권(75세) 씨만 유일하게 생존 중인데 그마저도 20년 전 수원으로 이사를 가서 세탁업을 하다가 최근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전주시 대성동에 사는 이기동 씨는 전북무형문화재 10호인 선자장(扇子匠)으로 지정되어 각종 TV, 라디오, 신문 등 매스컴에 등장하여 유명세를 탄 행운아가 되었다. 이분 역시 안골의 배귀남 씨에게 기술을 전수 받은 사람이다. 이분도 2009년 6월, 79세로 별세했다. 그렇다. 이곳 안골은 해방 후부터 30여 년 간 합죽선제작의 명맥을 이어온 원조명인들인 그야말로 ‘이름 없는 별들’ 이 살던 마을이다. 요즈음 같으면 1시간짜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방송될 법한데 아무도 기억해 주는 사람조차 없다. 그 당시 이 동네는 총 25가구 중 초가집이 23가구, 기와집이 2가구가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그런데 그 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개발사업으로 인해 옛날 집들이 모두 철거되고 토지도 중장비가 동원된 구획정리가 실시되어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 뒤 이 마을에는 아파트, 단독주택은 물론 무슨 삼겹살집, 순대 집 등 음식점과 은행, 편의점, 모텔 등만 즐비하게 들어섰다. 이것이야말로 이 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이를 쭉 지켜본 나로서는 슬픈 추억이 아닐 수 없다. (2012. 9. 3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FLOAT LE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