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IS MOBILE PAGE (~767)
WEBIS TABLET PAGE (768~991)
WEBIS DESKTOP PAGE (992~1279)
WEBIS BIG DESKTOP PAGE (1280~)

소대장 길들이기/김현준 > 자유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서브비주얼

도전하는 노인, 함께하는 안골!

  • HOME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 HOME
  • 자유게시판

소대장 길들이기/김현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634회 작성일 12-09-27 16:11

본문

소대장 길들이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현 준 1970년 육군 소위로 임관한 나는 광주보병학교에서 16주 훈련을 받고 강원도 양구 북방 문등리 계곡의 동부전선 철책선 부대 소대장으로 처음 부임하였다. 해발 900m가 넘는 험준한 태백의 준령들이 동에서 서로 꿈틀꿈틀 뻗어 내린 최전방이었다. 벌겋게 녹슨 철조망이 남북을 가르고 그 철조망을 따라 끝없이 교통호가 이어졌다. 산봉우리 후사면(後斜面)을 파고 지하에 만든 벙커는 통나무로 얽어 놓아 그 정경이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를 연상케 하였다. 후줄근한 병사들의 차림은 6·25전쟁 때 중공군 행색을 닮았다. 중대장 조영달 대위는 악바리였다. 헌병 하사관으로 근무하다가 특수 간부후보생 과정을 거쳐 임관했는데, 군에 대해서는 귀신이었다. 신임 소대장들을 닦달하려고 그랬는지 어느 날 소대기지 내에 설치된 클레모어 격발기를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방전되지 않는 고장 난 격발기를 수거하여 11시까지 중대본부에 도착하라는 명령이었다. 클레모아는 매우 중요한 방어무기였다. 월남전에서 위력을 떨친 폭발물로 우리나라의 산악지형에 잘 맞았다. 전선을 10m정도 연결하여 격발기를 누르면 요란한 굉음과 함께 전방 160도에 걸쳐 인마살상이 이루어지는 방어무기다. 후폭풍의 효과도 매우 커서 휴전선을 지키는 장병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는 무기였다. 나는 1km가 넘는 작전구역에 걸쳐 설치된 2백여 개의 클레모아 격발기를 짧은 시간에 점검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분대장들에게 불량품을 샘플로 몇 개씩 가져오라고 지시했더니, 오래지 않아 20개를 모았다. 잠낭에 넣어 여유 있게 중대본부로 향하니 일착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잠시 뒤 1소대장 백 소위와 화기소대장 이 소위가 정해진 시간에 임박하여 헐레벌떡 뛰어왔다. 3소대장 오운선 소위가 점화 스위치를 가득 담은 배낭을 들고 도착한 것은 정오가 다 될 무렵이었다. 오 소위는 하나하나 점검을 하여 불량 격발기는 모두 수거하였다. 3km나 떨어진 중대본부까지 산등성이 교통호를 타고 오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조 대위는 뱀눈을 뜨고 이빨을 갈더니 오 소위의 뺨을 후려치기 시작하였다. 작전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겼으니 3소대는 전멸했다는 것이다. 오 소위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동료를 도울 수 없는 내 처지가 너무나 비참했다. 그 뒤부터 오 소위는 장교가 된 것을 후회하는 말을 내비치곤 했다. 오 소위는 부산에서 대학을 다녔다. 장교생활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의 누나와 교제를 하던 해군 대위가 문제였다. 누나를 찾아올 때마다 하얀 장교 정복을 잘 손질하여 입고 한껏 멋을 부렸다. 동생인 운선에게도 선물을 사주고 군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만 하였다. 여기에 홀딱 넘어간 것은 누나뿐만 아니라 동생 운선이도 포함되었다. 무턱대고 제2사관학교에 응시하여 초급장교가 된 것이다. 후보생과정에서 얼마나 갈등이 많았을까? 조 대위는 빈틈없는 군인이었다. 당번병에게 깍두기 담그는 법과 그 크기까지 그려주며 확실하게 지시하는 것을 보고 모두 혀를 내둘렀다. 부식창고에는 매 끼니마다 먹어야 할 양념거리들을 비닐봉지에 표시해놓고, 날마다 당직 근무자들을 대동하고 다니며 확인하였다.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처리하려고 하며 노상 짜증스러워했다. 내가 차량사고를 당하여 군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였다. 말이 병원이지 환자 10여 명에 군의관, 위생병 등 조촐한 규모였다. 막사만 뎅그러니 규모가 컸다. 급하고 중한 환자들은 후방으로 이송을 하기 때문에 긴장감이 적었다. 환자들은 점차 친숙해지고 동네 주민들에게 부탁하여 닭백숙을 함께 먹기도 하였다. 어느 날 사모님이 면회를 왔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아 사모님이 없으니 다른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이지 싶었다. 그러나 분명 나를 찾는다는 전언이었다. 위병소에 나가보니 처음 보는 아낙네였다. 누구시냐고 물으니, 중대장 조 대위의 안사람이라면서 얼마나 고생하느냐고 위로의 말을 하였다. 쾌유를 비는 기도를 드리고 갔다. 고향에 연락을 하면 걱정만 할 것 같아 일체 알리지 않은 사고였다. 나는 그날 중대장 조 대위 부인의 문병 때문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고마웠다. 조 대위의 차가운 얼굴 뒤에는 그런 부인의 따스함이 있었다. 전방 중대장은 막중한 전투 임무를 부여받은 작전 지휘관이다. 조 대위가 부임하여 처음 부여한 명령을 오 소위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다만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과도한 폭력을 행사한 것은 지나치다 할 수 있다. 어찌됐건 조 대위의 신임 소대장 길들이기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얼마 뒤 오 소위는 주특기 병과를 행정으로 바꾸고 후방 행정학교에 입교하려고 부대를 떠났다. (2012. 9. 2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FLOAT LE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