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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 이야기/김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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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709회 작성일 12-05-06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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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이야기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현 준 (1) 1980년대 초 A고에서 처음으로 3학년 이과반 담임을 맡았다. 그 당시 인문계고등학교의 평가는 대학입시 결과로 판결이 났다. 그 중에서도 서울대를 몇 명 보내느냐가 기준이 되었다. 학급의 평가, 특히 담임의 평가는 이와 직결되며 새 학년 담임 배정은 전적으로 전년도의 입시 성과에 달려 있었다. 나는 A고에 부임한 지 2년밖에 안 된 신출내기에다 교육경력이 일천하여 지극 정성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억세게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성적이 최 상위권이었던 학생 3명이 모두 의대로 진학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서울대 의대에 합격할 수 있는 재목이라면 좋겠지만, 그 정도의 성적이 되려면 전교생 7백여 명 중에서 1, 2등을 차지해야 가능했다. 모험할 필요 없이 지방대 의대를 가겠다는데, 내 생각에도 수긍이 갔다. 그건 어쩌면 올바른 선택이었다. A고는 전년도에 서울대 입학생 수에서 좋은 실적을 올린 명문 학교였다. 그해 졸업생이 그에 미치지 못할 것은 고교 평준화 첫 졸업생이라는데 있었다. 듣기 싫은 '뺑뺑이' 소리를 주위에서 얼마나 들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선배들의 면학 분위기를 수용하여 그만큼이라도 성적을 유지한다고 보아야 했다. 몇 몇 아이들은 선발제입시라 해도 A고에 합격할 수 있었는데, 도매금으로 평가절하 된다고 불만이 컸다. 이제 비상사태에 들어가야만 했다. 점수가 기대에 훨씬 못 미친 L군을 달래보는 수밖에 없었다. 숫자 채우기로는 어쩔 수 없이 농대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오래된 관행으로 실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L군 점수로 농화학과나 농생물학과는 가능했다. 조용히 불러 상담을 하였다. '농대에 간다면 동창회 장학금을 지원해 주도록 노력하마. 다니기 싫을 땐 재수를 하도록 하자.'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어 일이 수월하게 풀리는 듯했다. 입학원서를 다 쓰고 발송하려는데, L군의 형이 찾아왔다. 서울대 공대에 재학 중이었는데 농대는 절대로 안 보내겠다는 이야기였다. 참으로 난감했다. 사대 몇 개 학과가 경쟁률이 저조할 것이라며 화학교육과를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학교 배치점수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실낱같은 기대가 없지 않아 입학원서를 정정하고, 교감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뒤 곧바로 직인으로 수정을 하였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합격자 발표 날 L군의 합격 소식을 접하고 안도의 숨을 돌렸다. 교감 선생님은 농대 합격자 중에서 L군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나를 불렀다. 나는 사대에 원서를 넣어 합격했다고 말씀 드렸다. 잠깐 갸우뚱 하시더니 "합격했으면 됐지."하고 좋아하셨다. 1명이 지원하여 100% 합격을 한 것이다. 겨우 체면을 차리고 위기를 넘겼다. L군은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형제자매들이 모두 수재였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L군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KAIST 대학원에 진학하였으며,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국내 유명대학의 강단에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의대에 진학한 K군은 내과를 개업하여 나의 고혈압을 관리해 주는 주치의가 되었다. (2) J고교 제자들의 서울 초청을 받은 것은 졸업 기념 홈커밍데이가 있던 6월의 일이었다. 그날, 분에 넘치는 환대에 세월을 잊고 기고만장했었는데, 매년 우리부부를 서울로 초청하겠다는 것이었다. 취중이라 쾌히 응낙하였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송 군의 내방을 받고서야 그 약속이 생각났다. 솔직히 심란하기도 하고 가고도 싶고 갈등이 있었지만, 적극 동조하는 아내의 성화에 밀렸다. 11월 하순 토요일 오후,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모처럼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처가가 서울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한 뒤 서울에 갈 일이 별로 없었다. 출장이 있을 때는 지하철만 부지런히 타고 서울 하늘 한 번 제대로 못 본 채 허둥지둥 내려오기 일쑤였다. 모처럼 한유한 기분에 낮잠까지 즐기고 고속버스 터미널에 들어서니 송 군과 변호사 전 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식사 장소는 조촐한 횟집이었다. 대기업 부장으로 있는 이 군까지 열여섯 명의 제자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20년이 지나 처음 만나는 얼굴도 있었지만 시간을 뛰어넘어 금세 어우러졌다. 아무래도 막소주는 부담이 될 것 같아 과일주를 선택하여 걸신들린 사람들 마냥 마셔댔다. 술이라면 잔소리를 빠뜨리지 않는 아내가 이날은, 더 들어라 권하고 보니 아니 마실 수가 없었다. 내가 가장 많이 마신 것 같다. 자그마치 서른여덟 병에 술값만 삼십여 만 원이 나왔다. 걱정을 하니 양주 마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란다. 우리네 사고와는 다르겠거니 하며 신경 안 쓰기로 했다. 옛적 이야기, 요즘 얘기를 섞어가며 왁자지껄, 전형적인 동창회 모습이었다. 우리는 반창회라고 불렀다. 대화중에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강조하였다. 학교에서의 우열은 초반 10km 정도의 기록에 불과한 것이다. 거기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자고 다짐했다. 그런 중에도 4명의 제자들이 타계했다 하여 안타까웠다. 세 사람은 불의의 사고로, 한 사람은 지병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고 하였다. 교복을 입은 해맑은 모습들이 떠올라 가슴이 찡했다. 남은 이들은 건강과 안전에 힘써 담임보다 먼저 가는 일이 없이 오래오래 살기를 빌었다. 2차는 노래방이다. 노소동락으로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고 다리를 꼬았다. 숙소는 L호텔 29층으로 잡아주었다. 김 군이 술도 마시지 않고 호텔까지 운전하였다. 한강을 끼고 있는 눈부신 서울의 야경이 황홀했다. 아침은 뷔페식이었다. 내국인보다 외국인, 그중에서도 중국 사람들이 많은데 놀랐다. 어느새 중국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10시쯤 송 군의 차를 타고 남산 타워에 올랐다. 세계박물관, 환상체험을 일별하고 360도 회전하는 카페에서 주스를 마셨다. 한 잔에 만원이라니, 서울 사람들은 돈을 부지런히 벌어야 되겠다고 엉뚱한 걱정을 하였다. 잘 정돈되고 발전한 서울의 모습에 전주를 떠올리며, 그래도 난 전주가 살기 좋다는 생각을 하였다. 한식집에서 가야금 연주를 들으며 점심을 잘 먹고 고속버스에 올랐다. 그때까지 배웅을 해 준 전 변호사와 송 군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모두들 건강하고 활기찬 나날이 이어지기를 빌었다. 결국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 것을 다짐했다. (2012.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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