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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상병과 검정돼지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현 준
1970년 6월 강원도 양구군 동면 북방 최전방에서 나는 소대장으로 근무하였다. 긴장 속에 바쁜 날들이 계속되었다. 밤 12시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는 순찰근무가 무엇보다도 힘들었다.
연대본부를 다녀오던 선임하사관 박 중사가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 왔다. 병사들은 건빵이나 군것질 거리를 주며 강아지를 키웠다. 털빛이 노란 토종개였는데 누구나 잘 따라서 소대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뒤 박 중사는 민통선 아랫마을에서 새끼돼지 한 마리를 사왔다. 내무반장 김 하사가 식당 가까운 곳에 작은 돼지우리를 지었고, 취사병들은 잔반을 모아 돼지를 거두었다. 병사들에게 전방근무는 힘들지만 먹는 것만은 충분하게 지급되었다. 여름철에도 도루묵국, 된장국, 갈치 국이 끊이지 않고 제공되었다.
돼지 먹이는 넘쳐났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효과도 있었다. 돼지를 키우다 보니 마치 소대가 가정인 것 같았다. 은연중 우리 모두 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최전방에서 시도 때도 없이 "꿀, 꿀, 꿀!" 외쳐대는 돼지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병사들의 사기진작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경기도 양평이 고향인 김성일 상병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꾼 같았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오래 해온 터라 부대의 잔일은 손쉽게 처리했다. 돼지를 키우는 것은 그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김 상병은 어찌 보면 부대의 보배였다. 그러나 무학에 가까워 휴가를 보낼 때는 퍽 고심해야 했다. 두꺼운 종이에 휴가사항을 기재하고 도와달라는 글을 적어주었다. 헌병이나 경찰에게 그것을 보이라고 당부도 하였다. 조마조마하던 김 상병이 귀대일자를 하루 남기고 미리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서둘렀다는 이야기였다.
김 상병은 나와 실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고향 동네에 젊은 과수댁이 살고 있는데, 퍽 좋아하는 눈치였다. 누렁이 개와 검정돼지는 소대원들의 보살핌 속에서 잘 자랐다.
부대는 3개월 전방근무를 마치고 교육대대로 임무가 변경되었다. 진지교대는 자정에 이루어졌다. 그날따라 장대같은 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교대부대의 선발대와 장비, 탄약 등에 대한 인계인수 작업이 이루어져 큰 문제는 없었으나, 누렁이와 검정돼지는 협상을 해야 했다. 인수부대 소대장은 무조건 안 받겠다고 버텼다. 적어도 돼지는 데려가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아직 신참 딱지가 떨어지지 않아 융통성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누렁이는 목걸이를 매어 내려 보냈으나 돼지가 걱정이었다.
어수선한 눈치를 챘는지 돼지는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그냥 놓고 가면 누구 좋은 일 시킬 것 같아 돼지를 하산시키기로 했다. 김 상병이 할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김 상병은 새끼를 꼬아 돼지를 묶고 양 어깨에 짊어졌다. 돼지는 산이 떠나가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어떤 병사라도 감히 엄두를 못 낼 일이었다. 군부대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철수로는 미끄럽고 경사가 심한 산길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은밀하게 이동하였다. 말 그대로 철수작전이었다. 짐을 새 막사에 풀고 나니 새벽 먼동이 텄다.
김 상병은 온몸이 땀과 빗물범벅이었다. 김 상병과 돼지에게는 끔찍한 하산 길이었으리라. 아마 대여섯 번은 함께 굴렀을 것이다.
교육부대에선 대대 병력이 함께 기숙하고 공동취사를 하기 때문에 누렁이와 검정돼지와의 세월은 끝났다. 누렁이는 이웃 동네 민간인에게 보냈고, 돼지는 얼마간의 돈을 받고 팔았다. 소대원들은 아쉬움 속에서 옛 이야기를 하며 모처럼 푸짐한 회식을 하였다.
김성일 상병은 제대할 때 파격적으로 전 소대원의 열렬한 환송을 받았다. 나는 기념품을 전달하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김 상병은 더듬거리며,
"고맙습니다. 고향에 가서 장가를 들고 열심히 잘 살겠습니다."
라고 마지막 인사말을 했다. 박 중사는 김 상병에게 농협에서 지급한 만기적금을 전달하였다. 김 상병은 입대한 첫 달부터 월급 전액을 적금에 부었다. 3년 군복무를 마치면서 당시 돈으로 송아지 한 마리 값을 가지고 귀향하였다.
지금은 고향에서 탄탄한 살림을 일구었을 것이다. 과수댁과 살림을 차리고 슬하에 자손들이 크게 번성했으면 좋겠다. 둥글넓적한 얼굴과 무릎까지 닿는 긴팔의 구부정한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김 상병의 투박하고 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소대장님! 안녕히 계시라고요!"
(2011.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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