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찾아서/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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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아서
김 학(金 鶴)
"의사가 되고 싶어요."
"연예인이 되고 싶어요."
추석 때 만난 어린 손자들은 저마다 장래의 꿈을 이야기한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제 부모들도 슬며시 얼굴에 미소를 그린다. 저 아이들과 같은 여덟 살 때 나는 어떤 꿈을 갖고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꿈이 없었던 모양이다.
내 고향은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삼계리. 요즘 내 고향 삼계면은 전국의 면단위에서 가장 많은 박사를 배출하여 박사고을이라 불린다. 부모들의 학구열이 높은 까닭이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자랑할 게 없는 가난한 농촌이었다. 흙과 나무와 풀과 바람과 곤충을 친구처럼 여기며 살았다. 그러니 내가 무슨 꿈을 꾸었겠는가?
옛날 우리 집엔 텔레비전은 물론 라디오와 전화도 없었고, 신문도 구독하지 못했다. 세상소식은 오수장에 다녀온 동네사람들이나 우리 동네를 찾아온 외지손님들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 그래도 불편한 줄 몰랐다.
고향에 살 때 어린 내 눈에 보이는 월급쟁이는 초등학교 선생님과 지서 순경 그리고 면서기가 전부였다. 그러니 다른 직장이 더 있으리라곤 짐작도 못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모두가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런 내가 무슨 꿈을 꾸었겠는가?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아야 꿈을 꿀 텐데 그럴 일도, 또 그것을 일깨워줄 어른도 아니 계셨다. 사람들은 으레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웃면 오수중학교에 들어갔다. 버스가 다니지 않아 날마다 8킬로미터를 걸어 다녔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때는 학교에서 장래 희망을 써내란 숙제도 없었다. 꿈이란 밤에 잠을 잘 때 꾸는 것으로만 여겼다. 꿈을 꾸다가 이부자리에 세계지도를 그리기도 했지만, 앞으로 내가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고등학교는 도청 소재지 전주에서 다녔다. 나는 도시로 나온 촌닭이었다. 고향에는 단층건물밖에 없었는데 전주로 나오니 도로는 넓고 빌딩은 높아 위압감을 느꼈다. 선생, 순경, 면서기가 전부인 줄 알던 내게 전주는 놀라운 세상이었다. 도청과 시청, 은행, 우체국, 전매청, 기차역, 신문사, 방송국 등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직장들이 많았다. 모든 것이 내 눈엔 신기하게만 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K대에 합격했지만 등록금 때문에 포기하고 동생을 고등학교에 보냈다. 재수를 하던 1961년, 5‧16쿠데타가 터지더니 국가고시를 치러야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대학입시제도가 바뀐 것이다. 이듬해 J대 사학과에 진학했고, 졸업할 때엔 중등학교 2급 정교사자격증을 받았다. 또 대학시절 ROTC훈련을 받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군 소위가 된 나는 육군 제17연대 1대대 4중대 2소대장으로 근무하다 1년도 되지 않아 대대 작전장교로 발탁되었다. 작전장교! 그 임무를 수행할 때 나는 두 번이나 졸도를 할 정도로 고생을 했었다. 제대준비를 하던 1968년, 느닷없이 북한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무장간첩 30여 명을 남파하는 바람에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 이른 바 1‧21사태였다. 무장공비 중 김신조를 생포하고 나머지를 모두 사살하고서야 작전이 종료되었다. 하지만 우리 대대는 날마다 완전군장으로 우리 부대 방어진지인 938고지를 오르내리며 훈련을 했었다. 이슬비가 내리던 어느 날, 산중턱에 오르자 싸락눈으로, 정상에 오르자 함박눈으로 변했다. 산꼭대기에서는 눈발이 바람에 날려서 어디가 길이고 고랑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고, 군화 속엔 눈이 녹아 물이 흥건했었다. 그때 만난 무좀은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나와 공생하고 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힘들었던 그 장교생활은 리더십을 기를 수 있는 아주 값진 체험이었다.
나는 고등학교시절부터 글을 쓰고 싶었다. 대학을 거쳐 군대시절에도 글쓰기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등단제도가 있는 줄은 몰랐다. S방송국 피디로서 수필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문인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고, 그 때문에 등단제도란 걸 알게 되었다. 1980년《월간문학》8월호에서 <전화번호>란 수필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수필가로 등단했다. 수필가, 그것은 잊었던 나의 꿈이었다. 내 나이 서른여덟 살 때에야 나는 꿈을 찾은 것이다. 등단하고 나니 꿈 너머 꿈이 잇따라 나타났다. 수필집을 내고 싶다는 꿈, 문학상을 받고 싶다는 꿈 등 꿈 너머 꿈이 줄줄이 이어졌다. 꿈은 저 혼자만 찾아오는 게 아니라, 늘 또 다른 꿈을 데리고 나타났다.
누구나 꿈이 있어야 한다. 꿈은 일찍 가질수록 좋다. 꿈을 이룰 준비기간이 길수록 성공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중반에 꿈을 만났는데, 내 손자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꿈을 찾았다. 자란 환경차이 때문일 것이다. 내 손자들은 나보다 훨씬 행복하리라 믿는다. 제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투자하느라 허리를 졸라매는 아들딸 내외를 보면 안쓰럽다. 하지만 부모를 잘 만난 손자손녀들을 보면 은근히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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