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남 수필가 세 번째 수필집 발문/이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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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跋文
문학은 언제나 실험이다
-남경 김길남 작가의 세 번째 수필집『구멍 뚫린 운동화』에 붙임
이동희
시인 ․ 문학박사 ․ 전북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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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시도하는 행위는 결국 내면의 반응이 아닌 것이 없다. 마음 가는데 발길이 옮겨지고, 손길이 닿게 마련이다. 어찌 발길 손길뿐이겠는가? 마음 길 마음결도 결국은 내면의 반응이기 십상이다. 내면에 어떤 그림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마음 길에 푸른 초장도 놓이고, 내면에 어떤 생각을 들어앉히느냐에 따라 마음결이 호수가 되기도 한다.
그런 내면의 반응으로 가장 뚜렷한 것으로 글쓰기만한 것이 있을까? 글쓰기는 내면의 울림을 언어화하는 작업이다. 언어화하지 않고서 내면을 드러낼 방법이 따로 마땅한 것이 없고, 언어화하지 않고서 사람됨의 구체성을 그려낼 적절한 방법이 없다. 글쓰기는 사람의 내면에 샘물처럼 고이는 의미와 가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사람됨의 그릇에 퍼 담는 행위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것은 곧 글을 쓰는 이의 사람됨을 온전히 드러내는 행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됨의 그릇이 중요한 것은 글쓰기의 본질에서 볼 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사람됨을 무엇으로 판정할 것인가? 한 사람의 행동거지行動擧止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단편적이고 찰나적인 행태만으로 한 사람의 전부를 판단하기에는 매우 큰 위험이 따른다. 보다 더 정밀한 판단 자료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꼽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말-언어다.
말은 사람됨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 보이는 수단이다. 사람이 가진 창조 능력 중에서 가장 뚜렷한 것이 바로 언어능력이다. 말로써 천지를 창조하고, 말로써 세상을 운영하며, 말로써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하며, 말로써 자신의 존재성을 증명해 낸다. 그러므로 말이야말로 사람됨을 표상하는 뚜렷한 수단임과 동시에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를 지닌 존재다. 영혼靈魂은 인간의 정신력의 요소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작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소중한 영靈과 혼魂이 담겨 있는 것이 바로 몸[肉體]이다. 그러니까 몸이라는 그릇 없이는 인간됨의 정수인 영혼을 담을 방법이 없다. 그런데 그 몸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닌 영혼보다는 하위 개념에 속하는 성정性情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따르면 성性은 마음이 사물에 접촉되지 않은 상태, 즉 심心의 미발未發을 말하고, 정情은 마음이 사물에 접촉된 상태, 즉 심心의 이발已發을 말한다. 그러니까 마음이 칠정에 감촉되기 전의 본성적인 상태를 성이라 한다면, 마음이 칠정(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에 노출되어 반응하는 것이 정이다. 이 정이 바로 글쓰기의 중심 제재가 될 수 있는 감정感情-정조情操-정서情緖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성이 되었건 정이 되었건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성정을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한 사람의 영혼의 깊이와 폭을 가늠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다.
이 말은 인간이 지닌 영혼의 깊이를 표출할 수 있는 통로도 몸의 반응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문학은 몸의 반응이 내면의 성정에 부딪쳐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를 기록하는 것이다. 그 반응을 ‘생각’이라 해도 무방하고 그 생각의 동류항을 사유思惟나 사색思索이나 명상瞑想으로 대치한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생각은 바로 인간 영혼의 창구다.
19세기 영국의 ‘신비주의 문인’으로 불렸던 제임스 앨런 James Allen은『생각하는 그대로』에서 영혼의 위치를 매우 현실적인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람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될 수 없듯이, 영혼은 사람의 생각과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생각이 곧 그 사람의 영혼이라며, ‘인간은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정신을 표상하는 언어야말로 한 사람의 됨됨이요, 따라서 그 사람의 정신작업의 소산인 글이야말로 한 사람의 정신력의 총화임과 동시에 영혼의 깊이요 넓이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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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하고 숭고한 인격은 신의 은혜를 입거나 운이 좋아서 생긴 것이 아니다. 올바른 생각을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신과 같은 숭고한 생각을 소중하게 품어온 대가이다.’라는 앨런의 목소리가 남경 작가의 수필을 읽는 내내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수필은 교훈과 감사, 각성과 감탄, 탐구와 호기심, 관조와 성찰의 변주곡들로 가득하다. 1부에서 7부까지 장을 가르고 있지만, 7부를 따로 언급하기로 한다면 6부까지 모두 그렇다. 자신의 서문에서 이미 언급하고 있지만 신변잡기요 생활의 편린이라서 보잘 것 없다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겸사謙辭일 뿐이다.
수필의 태생이 그렇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사람의 영혼은 정신과 동류항이고, 그 정신력은 곧 그의 생각이 낳는다고 했다. 일관되게 지니고 있는 생각의 파장은 그 사람의 삶의 족적과 전혀 무관할 수 없다. 신변잡기일 수도 있고, 생활의 편린일 수도 있는 소재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의 지평을 연장한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겸사로 물러설 일이 아니다. 오히려 평생을 교직에 몸담고 살아온 사람에게 사표師表로서의 의식구조를 하루아침에 버리겠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일이다.
남경의 수필들은 이제는 한 세월 접어두어도 좋은 시간의 간격을 끌어들여서 현재화하는 힘이 있다. 흔히 추억담으로 치부하기 쉽지만, 간고艱苦한 세월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동질의 공감으로, 그런 세월을 한참이나 비껴난 신세대들에게는 추체험의 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궁핍했던 세월을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인간의 진정성과 삶의 진실성이 보인다. 가난과 풍요를 대비시켜서 얻고자 하는 것은 풍요속의 근신을 요구함일 것이다. 근신을 謹愼-진실로 삼가고 공손하게 사는 것으로 보아도 좋고, 勤愼-삼가 부지런하고 진실 되게 사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
전쟁으로 겪어야 했던 고통의 세월, 보릿고개를 넘어가야 생존할 수 있었던 추억담을 다시 들려주는 것은 과거의 회억만이 아니다. 후회와 아픔의 반대쪽에는 지울 수 없는 교훈이 굵고 힘차게 마련되어 있다. 그것은 독자들의 생각의 저변에 다가섬으로써 다시는 과거의 아픔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다짐도 함께 할 것이다.
또 하나 남경의 수필에서 찾을 수 있는 소재의 특성은 과거 역사의 흔적을 진중하게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선조들의 자취를 더듬어가면서 정치사의 한을 들추기도 하고<학사루에 서서>, 고고학적 발굴의 현장에서 사람살이의 진정성을 반추하기도 하며<처처가 박물관> <2100년 전 완주사람들>, 각박했던 삶의 구체성을 통해서 혈육의 사랑을 아프게 끌어내기도 한다<달걀 한 개>.
남경의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굵직굵직한 현대사를 과감하게 제재로 채택하여 간과하기 쉬운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진정성을 그려낸다.<갱 속의 돌멩이>,<아덴만의 여명>,<우주인 이소연>이 그런 작품이다. 필자가 일일이 작품을 열거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다양한 소재들이 탐구자의 관찰에서 비켜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작품의 한 대목만을 발췌하여 필자의 언급에 면죄부를 받고자 하는 의도도 여기에서는 포기하였다. 그것은 한 두 작품에 걸쳐 있는 특성이 아니라, 작품집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남경 수필의 제재적 특징 중의 또 다른 면은 인관관계의 진중함을 다룬 작품 역시 적지 않다는 데 있다. 하기는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교단에서 살았던 사람의 영혼에 담긴 정신과 생각의 파장이 어디에 이를 것인가는 명확한 일이다. 그런 인연이나 에피소드를 수필의 소재로 삼은 작품들<궁금한 택배>,<내가 먼저 내야지>이 반드시 교훈을 담아내기 위한 수단만은 아닐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점차 희소해지는 인간관계의 소중한 아름다움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우회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이미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성찰省察하는 안목 또한 남경 수필이 지닌 굵은 특징이다. <구멍 뚫린 운동화>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운영해 나아갈 것이며, 어떤 사고방식으로 현실을 타개해 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픈 발을 끌고서라도 해외여행에 나선 것 자체가 용기 있는 도전의 자세이지만, 걸을 때마다 상처를 건드리는 운동화의 일정부분을 가위로 오려내고서 그예 여행-여정을 밟아가는 대목을 읽으면서, 생각의 깊이만큼 정신의 웅숭깊고, 정신의 파장만큼 영혼의 울림이 클 것이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또 하나 앞에서 언급했던 <달걀 한 개>에 나타난 간고한 삶의 고백을 통해서 행복은 물질의 풍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의 충족에서 온다는 것을 사실감 있게 설득하고 있다.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마음대로 지닐 수 없었던 세월의 저쪽에서 보면 물질의 풍요로움이 행복의 요체가 되겠지만, 반세기를 건너와서 보면 물질은 간 데 없고 달걀로 바꿀 수 있었던 공책 한 권의 풍요와 가난 속에서도 아들의 학업을 위해 달랑 달걀 한 개를 쥐어줄 수밖에 없었던 모성의 뜨거움이 바로 행복의 실체임을 진솔하게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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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1부에서 6부에 담겨 있는 작품을 통해서 남경 수필이 지향하는 바의 대략적 관점의 추이와 특성을 거칠게 언급하였다. 이를 통해서 수필 작가의 성정性情이 지향하는 바의 핵심을 파악하기에는 그리 모자라지 않을 것으로 사료된다.
다만 한 가지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기왕에 수필문학의 본류에 진입한 마당에 좀 더 차원을 달리할 수 있는 수필문학의 탐구에 진력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수필이 문학의 차원에서 쓰이고 읽혀지기를 바라는 작가와 독자의 공감대를 넓혀가자는 뜻에서 그렇다.
모든 예술적 창조물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항목은 바로 시정신의 구현이다. 장르를 달리하는 예술에도 시정신은 필수의 요소다. 하물며 문학의 의장意匠을 걸친 수필에서야 시정신의 구현을 요구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정신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참신하고 개성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아도 과히 틀리지 않는다. 현실에서 촉발하였으되 현실을 초극함으로써 인간의 성정에 가치 있고 심미적인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학이 지향해야 할 첫 번째 의무요 목적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수필이 신변잡기의 개인 문학에서 출발해서 누구도 하대할 수 없는 서정문학의 본류에 진입하려면 무엇보다 시정신이 넘치는 문학성을 확립해나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시적 상상력은 어떻게 발휘되는가? 문학적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인식의 세계는 그 자체가 역설 혹은 반어irony로서의 진실이다. 시적 상상력 전개 역시 이와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상상력이란 과거 체험한 사물의 이미지를 재생-확대-제한-변형하는 능력을 말하며, 동시에 이미지에 따라붙는 정서와 의미체계를 감수성의 통일로 이끌어 완전하게 한 편의 문학체계로 진입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이런 시적 상상력의 의미를 수필에 적용한다면 우선 개성적 문체와 사물을 보는 탁월한 안목으로부터 비롯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직접체험과 간접체험의 통찰력洞察力을 확립하는 것으로부터 나아갈 수 있다.
남경 수필에도 이런 가능성은 무수히 잠재해 있다. 남경 작가가 치러왔던 치열했던 삶의 족적과 연치에 버금하는 다양한 직접체험은 남경 문학의 보고寶庫가 되기에 충분하다. 다만 그런 다양한 직접체험의 소재들을 재생하고 변형시키고 확대하며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교훈 일변도의 목적성이나, 혹은 추억을 반추하는 서정성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상상력이 미쳐야 할 대목은 다양하다. 물질적 상상력을 통해서 사물을 장악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도 시적 상상력이 감당해야 할 몫이며, 우주적 상상력을 통해서 우주를 열어 보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해야 할 대목도 시적 상상력이 감내해야 할 몫이다. 아울러 신화적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신화의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적 상상력을 끊임없이 계발하여 수필문학의 지평을 확대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남경 수필만이 아니라, 요즈음 더러 거론되는 수필문학의 문제점에 대한 진단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격조의 아쉬움을 말하면서도 그 돌파구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는 소홀한 감이 없지 않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런 해결책으로 시적 상상력의 과감한 도입만이 수필문학이 본격문학으로서 승화될 수 있는 길이라고 본다.
인간의 삶에서 교훈은 소중한 것이다. 태생적으로 모순과 유한성을 본질로 하는 어리석은 존재인 인간은 끊임없이 가르침을 청해야 하고, 가르침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을 영위하는데 교훈 찾기에만 매달린다면 유한한 인생이 얼마나 삭막하고 낭비적인 삶이 되겠는가?
스펜서 존슨-Spencer Johnson의『선물』에서도 언급한 이야기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 그것은 바로 '현재'라고 했다. 행복을 원한다면 현재 속에 살라는 것이다. 과거는 과거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교훈을 얻으면 되고,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미래를 계획하라고 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행복의 결정적 요인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보다는, 아직 닥치지도 않은 미래보다는 현재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직접체험은 모두 과거의 일이다. 추억의 장으로 넘어간 것들이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수필의 직접 소재로 삼으려는 것은 과거체험의 반추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풍부한 시적 상상력을 계발하기 위하여 진력하고, 이를 통해서 현재의 삶을 ‘선물’이 되게 하는데 수필문학이 기여해야 한다. 그것은 추억을 제재로 할지라도 그것을 심미적으로 변형시키고, 시적 상상력으로 확대하거나 재생시킬 것을 뜻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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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능성을 남경은 스스로 열어 보이고 있다. 제7부 <외나무다리>에 담겨 있는 8편의 작품이 그것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를 가리켜 ‘실험수필’이라 했다. 이어서 그런 형식은 자주 볼 수 없는데 의도적으로 써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많은 채찍을 바란다고 밝혔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가 겸손하게 표현하였지만, 필자가 앞에서 밝힌 상상력의 생성 공간을 작가는 진즉에 간파하고 그런 방향으로 작품의 길을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작가가 말한 ‘실험’이란 당치 않고 마땅히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바를, 더구나 신변잡기와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고 심심치 않게 질타를 받고 있는 수필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다잡아 나가고 있는 셈이다.
모든 문학은 실험이다. 그러니 그렇게 생성된 작품 또한 실험 작품인 셈이다. 한 작가에게 있어서 기존의 작품과 다름없는 형식과 내용을 고집스럽게 적용하려 한다면 그런 작가, 그런 작품에서 무슨 심미적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작가는 끊임없이 현상을 부정하고 기존의 체계를 허물면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정신적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앞에서 문학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역설이요, 반어-irony를 본질로 한다고 밝히지 않았던가!
<외나무다리>의 예를 보자. 이 작품에서 제재가 상상력의 역동성을 타고 뻗쳐 나아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역사적 다리(몽고족의 침입)에서 비롯하여, 현실의 공간으로서의 다리(삽다리, 학다리, 도매다리)로 이어지더니, 개인사의 다리(군대시절의 섶다리)를 섭렵하고, 현대사의 다리(섬을 잇는 여러 다리)를 거론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통’의 의미로 귀결된다. 앞에서 여러 다리를 건너다닌 구성의 필연성은 바로 소통의 영역으로 끌고 가기 위한, 체험을 변형-확장시켜 서정적으로 재생하기 위한 필연적 절차였던 셈이다. 그런 사유의 공간에 바로 시적 상상력이 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위에서 상상력이란 과거 체험한 이미지를 재생하거나 변형시키거나 확대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또한 그런 상상력은 정서와 의미체계를 감수성의 통일로 이끌어 한 편의 문학작품으로 완성시키는 능력이라고도 했다. 이런 규정에 합당하게 남경 작가는 ‘외나무다리’를 소통의 다리로 변형시키고, 마침내 우리 사회에 결핍된 것이 무엇인가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제7부에 있는 여덟 편의 작품 모두가 이런 패턴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한 작품만 더 보기로 한다. <통섭의 인간>이 그런 본보기가 될 수 있겠다. 잘 아시다시피 ‘통섭通涉’이란 널리 두루 통하여 이름을 뜻하는 말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각 지식의 분야들은 각각의 연구 분야의 활동에서 얻어진 사실들에 기반을 둔다. 그렇지만 또 다른 연구 분야의 활동에 의존하는 면이 크다. 예를 들어 원자물리학은 화학과 관련이 깊으며 화학은 또한 생물학과 관련이 깊다. 물리학을 이해하는 것 또한 신경과학이나 사회학, 경제학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듯 다양한 접합과 연관은 여러 분야 사이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렇게 확대되고 상호 소통하는 확산적 현상을 일컬어 통섭력通涉力이라고 한다.
남경 작가는 이런 통섭의 이론을 수필 문학의 제재로 끌어 들여 새로운 경지를 펼쳐내려 한다. ‘한 우물을 파라’는 기존의 금언이요,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의 행동강령이었다. 그러나 현대에도 이런 금언이 통용될 수 있을까? 시대의 변화는 물질세계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고방식[paradigm]의 변화를 초래하고, 마침내 의식체계에 안존하고 있는 진리의 개편을 요구한다. 그래서 ‘열두 가지 재주 가진 사람 끼니 간 데 없다’는 속담이 오히려 현대사회에 와서는 역전된다. 과거 악덕이었거나 기피했던 특성이 오늘 날에는 오히려 빛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진리의 개편이라기보다는 진실의 수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필문학이 바로 이런 경지까지 통섭할 수 있어야 하겠다. 남경 작가에게서 그런 가능성이 ‘실험수필’이라는 범주 안에 담겨 있음을 목격하는 일은 뜻 깊은 일이다. 그것이 문학적으로 성공 여부를 떠나서 부단히 추구해 가야 할 작가의 소임이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예술 작품은 실험 정신을 본질로 한다. 문학은 모든 문화․예술의 원천적인 질료요 궁극적인 의역의 결정체다. 시정신에 입각한 상상력이 결여된 예술을 본격 예술로 간주하기 어려우며, 문학적으로 의역되지 않는 여타 장르의 예술품들이 온전히 감상자의 심미안을 자극하기 어렵다. 문화․예술은 운명적으로 시정신을 본질로 하고, 문학적 생성력을 태생적 운명으로 간직하고 있다.
필자는 남경 작가의 수필문학을 거론하면서 본문의 인용을 삼갔다. 그것은 이 짧은 발문 속에 인용문을 삽입하는 일이 독자들의 독서 효율성을 높이는데 조금도 기여하지 않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글에서 필자가 언급한 부분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해당 작품을 펼쳐보는 일이 부분 인용문을 읽는 것보다 효율적인 독서가 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요, 실험 정신의 적용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남경 작가의 수필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의도들이 문화․예술의 원천적 질료이자 궁극적인 결정체로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선언처럼 ‘실험정신’을 잠시라도 느슨하게 여겨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될 것이다. 모든 문학은 실험이요, 그로부터 생성된 문학작품은 실험 작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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