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픈 기억/김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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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기억
전주안골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현 준
김제에서 직장에 다니던 때, 김제시청에 근무하는 중학교 동창 송 과장을 만나 자주 식사를 하곤 했다. 우리는 옛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얼마 후 송 과장은 친구 한 사람을 더 불렀다. 박 아무개였다. 박은 시 외곽지역에서 조그만 건설회사를 경영하였는데, 주로 도로교통표지나 신호등을 설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돼지고기 삼겹살에 소주를 몇 병 비웠다. 반가운 자리였으나 나에겐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 뒤로 몇 차례 만나다 나는 그만두었다. 박 아무개와 얽힌 사연 때문이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나던 해였다. 중학생들이 혁명공약을 줄줄 외워야 하던 살벌한 시절이었다. 1학기 기말고사를 치르던 토요일 마지막 시간으로 기억된다. 날씨가 무더워 웃옷을 의자에 걸어놓은 게 탈이었다. 시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전에 교실을 나온 것은 두 번째 잘못이었다. 해방된 기분으로 운동장에서 뛰어놀다 교실에 들어가니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상의를 입었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우당탕 교실을 떠나갔다. 그때서야 상의 주머니가 열려있는 것을 보고 나는 아차 싶었다.
그날 담임선생님께 드려야 할 '여름방학' 책값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방학숙제는 방학 책 문제를 푸는 것이 기본이었다. 50여 쪽 남짓 될까. 대한교육연합회에서 편찬하여 일선 학교에 배포하였는데, 책값이 농촌에서는 작은 돈이 아니었다. 내 책 한 권 값이라면 지금까지 기억에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학급의 총무를 맡은 나는 자질구레한 돈을 걷는 일, 출석부 정리, 학급일지를 기록하는 일들을 맡고 있었다. 50명이 넘는 아이들의 방학책 값을 다 걷어 상의주머니에 넣어두었으니 주머니가 불룩하게 표가 났고, 아이들은 그걸 다 알고 있었다. 그돈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20대의 젊은 담임선생님은 한 달 봉급에 가까운 돈을 대신 내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 일을 학생에게 시켰다는 자책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키가 매우 크신 교감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러 의심나는 아이들을 대라고 다그칠 때는 하늘이 노랗고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되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이들 이름을 대지 않으면 네가 쓴 것으로 알겠다는 교감 선생님의 최후통첩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골똘히 생각하였다. 결국 두 학생의 이름을 불었다.
주머니가 열린 것을 알려준 친구 Y와 청소시간에 내 책상을 나르던 박 아무개였다. 확신이 없고 증거는 물론 증인도 없었다. 내 희미해진 기억에 남아 있는 아이들이라는 것뿐이었다. 성인이 되고서야 그냥 '끝까지 모른다'고 할 걸 하는 후회가 있었다.
Y는 어찌됐는지 모르겠다. 심성이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 편이어서 잘 넘어갔으리라 생각한다. 어찌 생각하면 주머니가 열린 것을 알려준 아이가 그 돈을 가져갔을 리 만무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박은 달랐다. 평소 학습태도가 좋은 편이 아니고,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학교에 불려 오시고 형이 다녀가는 등 법석을 떨던 아이였다. 모든 것이 꿩 구어 먹은 자리였다. 조·종례시간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을 들볶고 회유와 협박을 계속했지만 만사휴의였다. 며칠 북새통을 떨고는 흐지부지 잊혀졌다. 얼마 후에 모두가 기다리던 여름방학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질 못했다. 어찌어찌 전말을 전해들은 할아버지가 '손자녀석 버린다'고 변통을 하여 그 돈을 갚아주셨다. 나에게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고 한 번도 꾸중을 하지 않으셨다. 담임선생님은 반반씩 부담하자고 했다는데, 할아버지는 거절하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너무나 잃은 게 많았다. 후회되는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금방 어디선가 그 돈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누군가 몰래 돈을 가져다 놓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반세기가 흘렀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말처럼 가까운 곳에 해답이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좀더 냉정히 꼼꼼하게 따졌더라면 해결되었을 것을, 하고 뉘우치기도 한다. 아마 나만 모르고 몇몇 아이들은 알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지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때 잃어버린 돈이다. 가끔은 어떤 엉뚱한 녀석이 그랬을까 궁금해 하며, 그 아이가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죄의식으로 그 갚음을 받았을 게 틀림없으니까.
내가 교직에서 담임을 맡은 동안에는 아이들이 돈을 걷는 일은 절대로 시키지 않았다. 또 출석부를 정리하게 하거나 학급 잡무를 아이들에게 맡기는 일도 없었다. 김제에서 박 아무개와 헤어질 때 사과의 말을 한마디도 못한 게 아쉽다. 진즉 털어버릴 가슴 아픈 기억을 지금도 안고 살아가니 말이다. (2011.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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