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비를 찾아서/서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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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를 찾아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서상옥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드넓은 만주벌판의 푸른 초원에 노랗게 피어난 민들레가 우리 일행을 반겨주고 있었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이었던 국내성(길림성 집안현)에 우뚝 선 광개토대왕비와 피라미드를 연상케 하는 광개토대왕 능을 찾았다. 광개토대왕은 우리 역사를 빛낸 뛰어난 대왕이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높여 준 임금이었다.
우리나라 역사는 항상 외세의 침략 속에 살아왔다. 사료에 따르면 993회의 침략을 받아 왔다고 한다. 어찌 보면 지금도 남북한 모두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강대국의 압력에 몸살을 앓고 있다.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은(374-412) 18세에 왕위에 올라 많은 공적을 남겼다. 고구려 18대 고국원왕의 아들이다. 이름은 덕담(德談)으로 호태왕(好太王)이라고도 하며, 재위 시에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영락(永樂)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용한 연호로 의미가 크다.
소수림왕과 고국원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하여 북으로는 만주를, 서쪽으로는 요동 벌을, 남으로는 한강 이북 예성강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군주였다. 그야말로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서양의 정복자 알랙산드로스와도 비견되는 우리 역사의 자랑이다.
광개토대왕비는 그의 아들 장수왕이 재위 2년(414)에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새운 비로 호태비(好太婢)라고도 한다. 높이가 6.39m로 한국 최대의 비로 고구려 문화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너비가 1.38~2.00m 측면은 1.35~1,46m로 대석은 3.35*2.7m이다. 4면에 걸쳐 1.775자로 새겨진 비문은 우리역사 연구에 큰 자료가 되고 있다. 본래 비만 덜렁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중국이 대형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이 비석 서남쪽 300m 떨어진 곳에는 대왕의 능이 있다. 피라미드형 석총으로 되어 있으나 모두 도굴되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이 비석의 첫 부분에는 대왕의 일생을 매우 감격적으로 요약하여 정리해 놓았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하게 되었으며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러나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보다. 39세에 세상을 떠나시었다.’ 이 글은 당대 고구려의 국력이 이렇게 융성했다는 증거다.
광개토대왕의 비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부분은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비롯해서 동명성왕과 유리왕, 대무신왕과 광개토대왕의 행장을 기록해 놓았다. 둘째 부분은 주로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과 영토관리에 대한 내용을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기록에 의하면 64개의 성(城)과 1.400개의 촌(村)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셋째 부분은 능(陵)을 관리하는 수묘인(守墓人)의 차출 방식과 수묘인의 매매금지 규정이 있어 당시 수묘제의 실상과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왕은 부강한 나라를 세워 조상의 음덕을 기리며 대대로 영화를 누리고자 자신의 이름을 영락(永樂)이라 하지 않았을까?
오늘날 중국에서는 소위 동북공정이라는 미명하에 역사를 왜곡하여 우리민족이 세운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기만술을 쓰고 있다. 이것은 결단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작금 일본에서도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면서 학생들의 교과서에 실어 놓았다고 하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 옛날 약소국가인 우리나라가 감히 일본의 영토를 점령하다니 참으로 어불성설이 아닌가?
우리나라 국정교과서에는 국사과목도 제외되었다 하니 한심스럽다. 국사도 없는 우리 민족에게 무슨 국가관이 있고 애국심이 있다는 말인가? 주체성이 없는 우리는 외국어만 잘하면 그만이라는 사대주의교육관이 큰 문제다. 잃어버린 우리 땅, 고구려의 옛 터전에서 광개토대왕비를 바라보며 웅비하던 선조들의 말발굽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201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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