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생각/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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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생각
전주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강영신
아득한 옛날 유년시절로 돌아가 옛 추억을 그려보면 즐겁다. 봄이면 집 앞 논에는 붉은 색 자운영 꽃이 활짝 피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추억의 사진첩을 펼치면 그때 그 정경이 내 마음에 아른거린다.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잊을 수 없는 고향의 추억들이 동영상처럼 떠오른다. 나는 유년시절을 참으로 행복하게 지낸 것 같다.
우리 어머니는 6남매를 두셨다. 아들 셋에 딸 셋, 그중 나는 막내였다. 그래서 형제자매들이 질투를 할 정도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어머니가 마흔다섯 살 때 나를 낳으시고, 우리 막내딸 시집이나 보내고 죽어야 할 텐데 노심초사하시며 늘 챙겨 주셨다.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이제와 생각해 보니 내게는 성경책과 같았다. 내가 힘들 때면 성경책을 펼쳐보고 힘을 얻듯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힘들 때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그 사랑을 펼쳐 보며 힘을 얻곤 한다.
우리 집 앞에는 큰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고창에서 흐르는 냇물과 무장에서 흐르는 냇물이 합쳐지는 곳이었다. 큰 비가 오면 집 앞 논밭은 붉정불로 가득 채워져 바다를 연상하게 했다. 또 가뭄이 계속되면 냇물에 물자새를 세우고 발로 밟아 갈라진 논바닥에 물을 품어 올리곤 했었다. 부모님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 고생도 많이 하셨다. 하지만 나
는 그 시냇물에서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들이 헤엄치며 노는 것을 바라보며 친구들과 물장구도 치고 봄이면 냇가 가장자리에 서 있는 버들가지를 꺽어서 버들피리를 불며 놀기도 했었다.
우리 집은 뒤란이 상당히 넓었었다. 그곳엔 각종 과일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어서 봄가을 없이 많은 과일을 먹을 수 있었다. 감나무, 밤나무, 배나무, 앵두나무, 복숭아나무, 석류나무, 대추나무 등 종류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딸기와 토마토까지도 심었다. 그밖에도 뽕나무에서 오디를 따먹으면 입안이 새까맣게 물들기도 했었다.
집 뒤에는 범바위라는 산이 있었다. 봄이면 진달래며 이름 모를 야생초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새벽잠을 깨우는 각종 산새들의 울음소리는 청량하여 하루를 정말 상쾌하게 열어 주었다. 지금도 새들의 울음소리는 정겹게 느껴져나로 하여금 고향의 그리움에 젖게 한다. '고향에도 지금쯤 뻐국새 울겠네'란 동요를 들을 때마다 더욱 고향생각이 떠 오른다.
군것질이 귀한 가난했던 그 시절, 4키로미터나 되는 학교길을 오가며 친구들과 함께 삐비를 뽑아 껍질을 벗겨서 하얀 속살을 먹으면 달콤한 그 맛이 참 좋았다. 그리고 신작로에서 빈 소달구지를 만나 한참 타고 가면 "네 이놈들, 그만 내려라!" 하시던 아쩌씨의 목소리도 생각난다. 그때 함께 놀던 그리운 친구들은 다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요즈음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그 시절 옆집 고부댁 아주머니는 어찌나 정이 많으신지 그 집에 가면, 보리개떡과 옥수수를 손에 쥐어 주시곤 했었다. 비록 먹을 것은 부족했지만 정감이 넘쳐나는 이웃들의 정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 정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늘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고향을 찾았다. 2006년 4월 어느날, 팔십이 넘은 둘째언니와 서울에 사는 둘째오빠, 전주에 사는 셋째오빠, 우리 내외 등 다섯 명이 고향 나들이를 했었다. 그때 고향에 가보니 모든 것이 너무 많이 변해 버려서 고향의 옛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정감이 넘친 고향분들은 세월의 무게를 못이기고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추억이 담긴 냇가는 논으로 개발되었고, 어릴 때 넓게 보이던 집터는 몹시 좁게 보였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고향은 여전히 나의 안식처였다. 많은 추억이 담긴 옛 고향은 오늘도 나에게 편안함과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내 마음속의 고향은 옛모습 그대로여서 좋다. 지금도 고향을 생각하면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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