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IS MOBILE PAGE (~767)
WEBIS TABLET PAGE (768~991)
WEBIS DESKTOP PAGE (992~1279)
WEBIS BIG DESKTOP PAGE (1280~)

정장영 수필집 발문 > 자유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서브비주얼

도전하는 노인, 함께하는 안골!

  • HOME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 HOME
  • 자유게시판

정장영 수필집 발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727회 작성일 11-05-24 14:33

본문

<정장영 첫수필집 발문> 팔순 노수필가의 세상 보기 혹은 사람마음 읽기 -송림 정장영 첫수필집 《그때는 몰랐다》출간에 부쳐- 김 학 (수필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전담 교수) 1. 송림 정장영(松林 鄭庄永)과 수필의 만남 松林 정장영은 고려 현종 때 장원급제를 한 광유후(光儒候) 홍문공(弘文公) 정배걸(鄭倍傑)의 천호장공파 29세손이다. 아버지 현서(鉉瑞)와 어머니 최금옥(崔今玉)의 차남으로 전북 순창군 적성면 대산리 모산마을에서 태어났다. 1930년 8월 1일생이니 올해 81세. 유학자인 할아버지와 농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산자수려한 고향 적성에서 농심(農心)에 젖은 채 영특하게 자랐다. 정장영 선생의 선조가 순창군 적성에 터를 잡은 것은 4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때 여절교위(勵節校尉)를 지냈고 나중에 호조참판을 증수 받은 11대조가 그곳으로 낙향하셨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초계정씨(草溪鄭氏) 후손들은 불어났고, 지금은 종인 2천여 명이 전국방방곡곡에 흩어져 살고 있다. 松林 정장영은 늦은 나이인 아홉 살 때 적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학기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1945년 3월 大阪市 日本橋 尋常小學校를 졸업하였다. 그때는 바로 일본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으로 정장영 가족도 이재민이 되었다. 大阪第一鐵道學校에 합격하였으나 일본이 항복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바람에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소년이던 정장영은 1946년 고향으로 돌아와 동네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러다가 1948년에는 공립남원농업중학교에 입학하였고, 5학년 재학 중에는 또 6‧25한국전쟁이 터졌다. 석 달간의 인공치하 생활을 겪은 뒤 국민방위군에 응소하여 남원, 함양, 산청, 진주, 곤양, 남해, 하동, 구례 등지에서 넉 달간 공비소탕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51년 6월부터 13개월간 순창군 복흥, 금과국민학교에서 무자격 준교사 생활을 한 뒤 1952년 전주사범학교에 복학하게 되었다. 조국광복 때문에 2년, 한국전쟁 때문에 2년 등 4년이나 늦게 수학을 하게 된 셈이다. 그러다가 1953년 12월 징집이 되어 다시 군대생활을 하게 되었다. 격동의 혼란기를 살면서 겪은 정장영의 인생체험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그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나 소설로 그려도 좋을 만큼 파란만장했다. 어쩌면 松林 정장영으로 하여금 수필을 쓰게 하려고 조물주가 일부러 그렇게 인생 스케줄을 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정장영은 교직에 있으면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초등교육과에 입학했으나 졸업은 하지 못했다. 그러니 1991년 한국교원대학교 종합교원연수원 교장과정을 마친 게 배움의 끝이라고 해도 좋겠다. 松林 정장영은 순창을 비롯하여 남원, 김제, 임실 등 4개 시군의 여러 학교를 돌고 돌면서 근무를 했고, 임실성남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37년간의 교직근무를 마치고 정년퇴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모작 인생에 들어선 松林 정장영은 어렵다는 공인중개사자격증을 따고 인천에서 꿈을 안고 효성공인중개사무소를 개설했으나 여의치 않아 그만두었다. 지금은 초계정씨 전북지역 옥전회 회장과 초계정씨 족보 편찬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수필쓰기에 진력하고 있다. 송림 정장영은 아내 박복규와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고, 친손 외손을 합쳐 5명의 손자손녀를 두었다. 특히 큰아들 수인은 3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지금은 서울의 로펌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고, 둘째아들 수경은 농림식품부 사무관으로 근무 중이며, 한국게임과학고등학교 교사인 셋째아들 성문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직에 종사하고 있다. 松林 정장영의 인생 역정은 자서전을 쓰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군대생활도 무려 4년 3개월이나 했고, 교직에서도 늦깎이로 진급하는 등 험로를 걸었다. 그러기에 그는 평소부터 말 못할 사연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글쓰기에 관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松林 정장영은 마침내 2008년 2월 전주안골노인복지관에 수필창작반이 개설되자 1기로 등록하여 수필과 만나게 되었다. 인생의 끝머리에서 극적으로 수필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만남은 오히려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松林 정장영은 특별한 취미가 없다. 술 한 잔 마실 줄 모르고, 담배 한 대 피울 줄도 모른다. 장기나 바둑도 거리가 멀고, 화투나 포커, 마작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무색무취라고나 할까? 오로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스스로 공부하는 일밖에 별다른 여가생활이란 없었다. 팔순인 지금도 노인복지관에 드나들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또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다. 퇴직 이후에 서예와 한국화를 시작했지만 발전이 더디어 그만두고, 수필창작반에 다니며 틈만 나면 책을 읽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이자 취미가 되었다. 松林 정장영이 수필을 만났다. 그 뒤부터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매주 한 편씩 주옥같은 수필을 쏟아내고 있다. 정장영은 수필을 늦게 만난 걸 아쉬워하며 가버린 세월을 만회하려는 듯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피를 토하듯 수필을 쓴다. 젊은이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다. 그가 쓴 수필을 읽어 보면 그가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연치가 높아지면서 오히려 기억력이 더 좋아지는 것 같다. 그는 초등학교부터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기까지 12명의 담임선생님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다. 특히 일제 때 만난 일본인 담임선생님 이름까지도 말이다. 그의 천재적인 기억력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松林 정장영, 그는 단연 수필창작반의 모범생이라고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松林 정장영은 종합문예지 《대한문학》2009년 봄호에서 수필 <잊혀 진 정자> 외 1편으로 수필부문 신인상을 수상하여 당당히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늦깎이 등단이지만 지금도 초심을 잃지 않고 1주일에 한 편씩 꾸준히 수필을 빚는다. 그러던 정장영이 드디어 첫 수필집《그때는 몰랐다》를 출간하겠다고 나섰다. 대기만성이라고나 할까? 팔순 노수필가의 인생역정이 아로새겨진 수필집이 드디어 세상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2. 松林 정장영의 수필세계 이번 첫수필집 《그때는 몰랐다》에는 송림 정장영이 심혈을 기울여 빚은 수필 60편을 6부로 나누어 실었다. 이런 분량으로 편집한다면 앞으로 3년 동안 해마다 한 권씩의 수필집을 출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송림 정장영의 수필 속으로 더 들어가 보자. 정자(亭子)는 농촌생활에서는 떼어낼 내야 떼어낼 수 없는 존재다. 우리 농촌마을 앞에는 으레 좋건 나쁘건 정자 한 칸쯤 자리 잡고 있어, 춘하추동 어느 계절이나 오가는 사람들을 반겨준다. <잊혀 진 정자> 서두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정자문화가 잘 발달해 왔다. 산수 좋은 곳에 세워진 정자에는 과거 선현들의 시 현판이 걸려 잘 보존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정자문화가 가장 발달한 고을로는 전라남도 담양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은 대나무 밭이 많아 죽세공이 발달하여 경제적 기반을 닦아 윤택한 생활이 가능했으므로 경치 좋은 곳에 정자가 많이 세워졌다고 한다. <잊혀 진 정자> 중에서 이 수필은 정장영을 수필가로 등단하게 해 준 작품이다. 정자는 우리나라의 특색 있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선비들은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그 정자에서 모여 시를 짓고 시조를 읊으며 낭만을 즐겼다. 또 농촌의 정자는 농사일에 지친 농부들이 더위를 식히고 피로를 푸는 동네 쉼터 역할을 하던 곳이다. 정자는 동네의 갖가지 정보를 교환하는 곳이요, 입담 좋은 어르신으로부터 동네의 전설과 설화를 듣게 되는 배움터였다. 요즘에는 농촌처럼 도시에도 정자가 세워지고 있다. 글쓰기는 말하기 못지않게 현대인들이 갖춰야 할 필수 무기다. 그러기에 松林 정장영도 뒤늦게라도 글쓰기에 나선 것이다.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의사소통 행위다. 따라서 글쓰기에 능숙하다는 것은 체계적이고 명확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능력은 정보화 사회에서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자 소양이 된다. 이런 글쓰기를 통해서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정서를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농경사회의 서당공부는 과거에 응시할 일부 선비뿐만 아니라 교양인으로서 필수적인 학습이었다. 산업사회에서는 학교교육이 교양인보다 필수적 직업준비교육으로 변했다. 이제 치열한 경쟁사회라 남다른 특기와 새 기술이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고향을 찾아도 그 시절의 학동들은 거의 이승을 떠났고, 귀에 익었던 삼희성(三喜聲)을 들을 수 없다. 줄어가는 농촌인구에 늘어 가는 폐교 터는 서당 골과 같이 훗날 전설이 될 게 분명하다. 그리고 천 년을 잠들어 온 서당 골은 더욱 적막해질 것이다. <서당골> 결미 글쓰기는 우리 주변에서 문제를 찾고 이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다. 문제를 파악하여 글의 목적과 주제를 결정하는 일에서부터 글감을 모으는 일, 글감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일, 중심내용과 세부내용을 뒷받침하는 일, 이를 글로 옮기는 일 등은 모두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다. 화자는 고향 주변의 지명조차 예사로이 보아 넘기지 않는다. 서당 골은 서당이 있었던 곳을 의미한다. 거기에서부터 생각의 외연을 넓혀 한 편의 수필을 빚었다. 그러면서 요즘의 농촌에서는 아기 우는 소리, 다듬이 소리, 글 읽는 소리 등이 사라졌음을 꼬집고 있다. 부드러운 표현이지만 우리 농촌의 현실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수필은 평범한 일상에 새로운 의미의 옷을 입히는 문학이다. 수필가 정장영의 작품에서 자주 눈에 띄는 일이다. 태평양전쟁 중이지만 무난히 초등교육을 마치려던 무렵, 전세가 악화되어 대도시에서도 전시피난교육(공습을 피해 학년단위로 농촌학교에 집단 피신)에 시달렸다. 일본 본토 공습이 잦아진 해였지만 집단 피난학교에서 귀교했다. 1945년 3월 14일 졸업식 예정으로 안날(13일) 예행연습까지 한 뒤 담임교사로부터 3일 전에는 도쿄, 어제는 나고야에 미군폭격이 있었으니 오늘밤은 특별히 조심하라는 당부말씀에 두려움과 무서움을 느꼈었다. 경고가 틀리지 않아 그날 밤 미 공군 대공습이 있었다. 며칠 후 나는 불타다 남은 교무실 한쪽에서 개별적으로 졸업장을 받았다. 그것이 나의 처음 졸업식이었다. <앗아간 졸업식> 중에서 화자의 졸업식 수난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6년제인 남원농업중학교는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등 학제가 변경되었고, 때마침 6‧25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졸업식도 없이 서류상으로만 졸업을 하게 되었다. 또 전주사범학교 졸업식도 졸업 3개월 전에 군대에 징집을 당했으니 역시 졸업식에는 참석할 수가 없었다. 시대적인 비극이지만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러기에 송림 정장영 수필가는 남들이 체험하지 못한 수필소재를 많이 갖고 있으면서 기억의 창고에서 그 소재를 하나하나 꺼내어 깊이 있는 수필을 빚는다.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이야기는 정장영 수필가를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빈대, 벼룩은 재래식 주택에 기생하기 좋은 환경이었는데 주택이 하나둘씩 개량되니 생활터전을 차츰 잃어 자멸해 가는데 살충제는 금상첨화가 된 셈이었다. 이는 기생처가 사람에 한정되고 문명의 발전과 생활의 향상으로 개인위생이 청결제일주의로 발붙일 곳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모기를 제외한 빈대, 벼룩, 이들은 희귀해졌으니 천연기념물로 등록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생태계 파괴에 따른 재앙이 다가올까 두려움이 앞서지만 괜한 기우이겠지! 모기마저 없어질 그날을 기다리며……. <비, 조, 슬, 문>결미 제목부터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비, 조, 슬, 문>, 이는 무슨 군부대의 암호 같기도 하고 복술가의 주문 같기도 하지만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내용을 읽어 보아야 의문이 스르르 풀린다. 비는 빈대(비:蜰), 조는 벼룩(조:蚤), 슬은 이(슬:虱), 문은 모기(문:蚊)를 일컫는다. 옛날에는 아주 흔해서 우리 선인들이 몹시 괴롭힘을 당했던 물것 4인방들이다. 그것을 소재로 삼아 한 편의 재미나고 맛깔스런 수필을 빚었다. 점잖은 노수필가의 해학수필이라고나 할까? 강물이 가슴까지 차올랐다. (중략) 강에 들어가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한기는 사라져갔다. 강 속으로 몇 분이나 뛰어간지 모르지만 모래사장을 달리고 또 물속을 뛰고 계속 반복되었다. 물에서 나와 달릴 때는 온몸의 옷이 얼붙어 '와삭와삭' 소리를 내며 한기를 더했으나 강물 속을 뛸 때는 온몸에 온기가 돌았다. 처음 경험해 본 일이었다. 물 밖에서 달릴 때가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때 강물은 따뜻했다> 중에서 군대시절 엄동설한에 단체기합을 받던 이야기를 화소(話素)로 하고 있다. 살을 에는 겨울에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던 일을 반백년이 지난 지금 웃으며 긍정적으로 회고하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정장영 수필가의 수필들은 작품 속으로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화자의 기억력에 놀라 탄복하게 된다. 그의 뇌에 저장된 정보는 아무리 세월이 가도 녹이 슬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그의 기억을 지울 지우개는 없는 것 같다. 생업에도 3D업종에 역3D가 있고, 같은 직장에도 3D와 역3D가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모두 단감만 먹으려 든다. 땡감은 바로 먹지 못하고 우려내야하는 고통과 노력,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싫어한다. 우려내도 볼품없는 꼴이 땡감이다. 세상사는 모두 3D(땡감)에 역3D(단감) 현상이다. <단감 땡감> 중에서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단감과 땡감을 비유하고 그것을 의미화하여 문학성을 살렸다. 3D란 궂은일, 힘든 일, 위태로운 일을 일컫는 말이고 역3D란 좋은 일, 쉬운 일, 안정된 일을 말한다. 단감과 땡감을 3D와 역3D로 비유한 것은 참신한 발상이다. 정장영 수필가는 수필의 화소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수필을 쓸 때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 그 독자와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고 써야 한다.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나 표현을 쓰면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으며, 상대방의 입장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도 자연스러운 대화를 가로막는다. 수필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항상 독자가 눈앞에서 글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고 독자의 수준과 처지에서 궁금해 하거나 비판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나 내용은 무엇인지 고려하여 이를 글에 반영해야 한다. 수필가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거나 독자의 처지를 등한시한 채 글을 쓰는 일은 독자와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수필은 수필가의 체험을 소재로 하여 빚는 글이다. 수필가가 그 소재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그 맛은 달라진다. 작품에 표현의 기술과 미학적 예술성이 담겨있어야 하고 자기만의 독특한 필치와 독창적인 사고 그리고 자기만의 인생관을 담아 수필로 완성시켜야 할 것이다. 화자 정장영은 손자 때문에 월요일이면 아내와 헤어지고 금요일이면 만난다. 부인이 부부공무원인 아들 때문에 손자를 돌보려고 서울에 가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할머니의 손자 사랑이 눈물겹다. 어느 할머니가 이렇게 손자를 위해서 희생할까? 누가 시켜서 하랴만 귀엽고 하나뿐인 손자를 위해서 피곤함을 모르고 하는 일이라 누가 말릴 수 있을 것인가? 본능적인 내리사랑이라 할 수밖에 없다. 아들이 3형제지만 현재 손자는 '세헌' 단 하나뿐이니까! <손자가 무엇이기에> 중에서 손이 귀한 집안이니 초등학교 3학년인 손자 세헌이가 얼마나 귀하겠는가? 할머니할아버지로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이다. 사실 국가적인 문제로 등장한 출산율 감소는 누구에게나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고 말았다.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만 낳아 기르려는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화자는 "아들딸 구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군사정부 시절의 인구정책 탓이라며 근시안적인 정책을 꼬집고 있다. 더구나 호주제가 폐지되어 부계혈통원칙이 무너지고 여권이 신장된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우리나라도 출산기피와 3D기피현상까지 생긴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출산장려정책이 터져 나와도 젊은이들이 양육과 사교육비 부담의 두려움 때문에 선뜻 응하지 않는 분위기다. 옛날 사람들의 생각은 "제 먹을 것은 타고난다." 식이었는데 격세지감이 든다. 자유주의라지만 극단적인 개인주의 경향이 가져온 병폐다. <손자가 무엇이기에> 중에서 수필가 정장영은 생각이 깊다. 그는 어느 생물학자가 밝힌 인간의 출생확률이 무려 732만 4천2백억 분의 1이라며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존귀하냐고 환기시킨다. 놀라운 데이터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출생은 지금도 신의 영역이 아닐 수 없다. 화자는 오랜 교직생활을 하면서 사명감을 주장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세 가지 유형을 강조했단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세 가지 유형이 있으니 "꼭 있어야할 사람, 있으나마나한 사람,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이 가운데 두말할 것 없이 "꼭 있어야할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모든 물건도 꼭 필요하고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쓸모 있는 유용한 물건이 된다. 사람도 역시 가정, 학교, 사회, 국가에 필요한, 다시 말해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했었다. 이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는데 스스로 사명감을 깨닫고 보람 있고 충실한 인생살이를 하라는 뜻이었다. 후세에 족보 이외의 기록물에서 나의 이름 석 자가 눈에 띈다면 후손들은 그 얼마나 반기겠는가? <사명감> 결미 松林 정장영은 시사적인 문제에서도 글감을 잘 찾는다. 다양한 각종 통계자료도 그의 시선에 잡히면 좋은 글감이 된다. 칼럼으로 다루어야할 소재도 부드러운 수필로 다루어 독자의 공감을 자아낸다. 화자의 외유내강의 성품 탓이 아닐까 싶다. 3. 수필가 정장영이 가야할 길 책이나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은 글을 쓰는데 유용한 매체로서 각자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이들 매체를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책은 가장 오래된 정보매체이다. 전문적인 내용을 알려면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가서 책을 펼쳐보아야 한다. 신문은 최근에 화제가 되는 정보를 파악할 수 있고, 텔레비전은 정보 전달 속도에서는 빠르지만 충분한 자료를 얻는 데는 신문보다 뒤진다. 막내 매체인 인터넷은 그 어느 매체보다도 풍부한 정보의 보고(寶庫)다. 온 세상의 정보를 문자나 영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줄 뿐 아니라 탁월한 검색 기능까지 갖고 있어서 대단히 유용하다. 팔순의 노수필가 정장영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네 가지 매체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면서 수필을 살찌우고 있어 믿음직하다. 수필은 인간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만큼 인생문제를 깊이 천착하여 독자들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수필을 빚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고향의 문학단체에도 가입하여 젊은 향토문인들과 교류하며 창작활동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松林 정장영 수필가의 문운이 더욱 창성하여 제2, 제3의 수필집을 꾸준히 출간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팔순 노수필가의 세상 보기 혹은 사람마음 읽기에 독자들의 사랑어린 눈길이 오래 머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FLOAT LE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