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 들른 맹씨행단/김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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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들른 맹씨행단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길남
사위의 차로 충남 아산시 탕정에 가는 길이었다. 전주 우회도로로 들어서서 금마와 논산을 거쳐 단숨에 공주를 지났다. 정안을 지나 아산시 쪽으로 차를 몰았다. 계곡을 지나가는데 “맹씨행단”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국사를 전공한 딸이 들렀다 가자는 제안을 했다. 나도 가보고 싶던 곳이라 맞장구를 쳤다.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자리 잡은 집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뒤에는 설화산이 솟아있고 그 맥이 흘러내려온 명당자리였다. 실개천을 따라 들어가니 고불 맹사성 선생이 살았던 맹씨행단이 나왔다. 선생이 심었다는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반겼다. 그 중 한 그루는 원목은 죽고 둘레에서 새싹이 나와 자랐다고 한다. 느티나무도 9그루를 심었는데 지금은 2그루만 남아있다. 맹씨행단이라는 이름도 이 은행나무에서 유래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H자형의 고택이 의연한 자태로 서있었다. 맹사성 선생이 살던 이 집은 고려 말의 최영 장군이 지은 집인데 손녀사위인 맹사성에게 물려주었다. 집의 구조가 특이했다. 앞면 4칸 옆면 3칸의 집인데 가운데에 마루가 있고 양옆으로 온돌방이 길게 배치되었다. 방이 3칸씩이어서 양 옆으로 덧 처마를 만들었다. 지붕 전체 모습이 H자형이다. 우리나라 민간 주택으로서 가장 오래된 집이라 한다.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의 양반집처럼 크고 호화롭지 않은 게 특징이다. 사랑채도 없고 행랑채도 보이지 않는다. 마당이 좁았고 정원이 잘 가꾸어지지도 않았다. 집터를 다듬은 흔적이 없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청백리였던 고불 맹사성을 닮았다고나할까.
최영 장군은 고려 말의 충신으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훈을 남긴 분이다. 그런 정신의 장군이 집을 지었으니 호사스러울 리가 있을까. 있는 그대로의 땅에 소박한 집을 짓고 사셨다. 장군의 가르침을 받은 손녀도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었을 게 아닌가. 맹사성 선생도 조선시대의 청백리로 유명한데 내외가 같은 정신으로 살았으니 그 생활은 알만하다.
집 뒤에 있는 세덕사를 찾았다. 문이 잠겨 봉심할 수는 없었다. 맹사성 선생과 아버지 희도, 할아버지 유의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조부는 최영 장군과 절친한 사이였다. 장군이 이성계의 역심에 몰려 돌아가시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두문동으로 숨어 버렸다. 부친은 정몽주 선생과 동갑이고 동문수학 했는데 포은이 피살당하자 역시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한다. 충절의 집안에서 태어난 고불 선생이다. 역사는 흘러가고 흔적은 말이 없으니 지나는 나그네가 홀로 옛일을 회상할 뿐이다. 사당 뒤로 돌아가니 귀롱나무가 하얀 꽃을 달고 있다. 선영들의 깨끗한 정신을 나타낸 것 같아 마음이 가다듬어졌다.
고불 선생은 좌의정의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일반백성들과 같은 차림으로 살았다. 이웃집 아저씨 같이 허름한 옷을 입고 소를 타고 다녔다. 공무가 아닐 때는 수행자 없이 홀로 행차하였다. 선생의 공당 문답도 이런 차림에서 유래하였다.
고불이 온양의 선영에 성묘를 마치고 가는데 소나기가 몰려왔다. 비를 피하려고 주막에 들렀을 때 마침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와 만났다. 우리 심심하니 문답놀이나 하자고 제의했다. 말끝을 “공”과 “당”으로 하기로 하고 고불이 먼저 시작했다.
“어디서 왔는공” “00에서 왔습니당” “무엇하러 가는공” “과거 보러 갑니당” “내가 합격시켜 줄공” “놀리는 건 옳지 않습니당” 하고 비를 피했다. 그 뒤에 선비는 과거에 합격했고 인사하러 정승을 뵈러 갔다. 맹 정승이 먼저 알아보고 “어떻게 되었는공” 하니 선비가 깜짝 놀라며 올려다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당” 했다는 이야기다. 행차 모습을 보고 사람의 품위를 저울질하는 시절에 시골사람 같은 모습의 맹정승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었으랴…….
고을의 아전 벼슬 만해도 거들먹거리고 위세를 부리던 때에 고불 같은 선비는 별로 없었을 게다. 조선시대에 청렴하고 깨끗하게 살다간 분들을 기리기 위해 청백리를 뽑아 기록하고 만세에 남겼다.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219명, 청선고(淸選考)에는 186명의 청백리가 기록 되어 있다 한다. 이런 분들이 있어 우리 역사는 흔들리지 않고 연면히 이어오지 않았는가.
내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검소하게 살려고 하지만 윗옷 하나는 이름이 있는 옷이다. 요즘은 메이커가 무엇이냐에 따라 급수를 매기는 추세다. 값이 비싸야 좋은 옷이라는 평을 받는 게 현실이다. 백화점에서는 값이 싼 옷은 팔리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아 마음이 언짢다.
넓은 아파트에 호화가구를 들여 놓고 사는 게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차려야 행세를 한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못살고 굶주리며 살던 '아끼는 세대'는 가버렸다. 그래도 아낄 것은 아끼며 살아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인데 염려가 된다. 길을 가다 만나 뵌 청백리, 고불 선생이 오늘의 모습을 보면 무어라 하실까.
( 2011.5.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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