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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비의 현해탄/정장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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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832회 작성일 09-08-0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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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비의 현해탄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정장영 우리나라는 반도의 나라다. 고대로부터 대륙과 해양의 시대조류에 따라 숙명적으로 시련을 겪어야 했고 이를 이겨가며 살아온 민족이다. 우리 세대 또한 거센 해양조류와 뒤따른 대륙풍 극복에 힘써야만 했다. 나 역시 태어난 뒤 젊은 시절 그 풍랑에 밀려 그중 한 곳인 현해탄과의 인연을 갖게 되었다. 바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홉 살(1939년 12월) 때 처음 멋모르고 이 바다(현해탄: 대한해협)를 건넌 것이다. 적성보통학교 1학년 2학기(당시는 3학기) 과정을 마치고 겨울방학 때였다. 고향인 적성면 대산마을에서 할머님과 큰어머님께 작별인사를 마치고 큰아버지와 어머님, 형, 나 넷이 이른 아침 오솔길을 나섰다. 면소재지에서 남원 가는 정기버스를 타고 자갈길인 신작로를 달려 남원역 앞에서 내렸다. 거의 낮 12시쯤 되어 여수행 기차를 탔다. 나로선 생전처음 신기한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오후 4시쯤 여수에 도착하여 승선수속을 마치는데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우리를 잘 보내기위해서 따라오신 백부님을 작별하고 관여연락선[(여수~시모노세키(下關)간 정기 여객선)]에 올랐다. 석양노을에 겨울 바닷바람이 차가왔는데 뽀오오 뽀오오 하는 기적소리를 울리며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미를 한다기에 일찍 자리를 잡아 누웠는데 어느새 잠이 들어 버렸다. 잠에서 깨어 보니 많은 사람들이 멀미로 시달려 토하고 아우성이었으나 다행히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날이 새 이튿날 아침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한 것이다. 오전 9시경 어제 탔던 같은 기차 급행열차(뒤에 알게 된 東海道本線)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어제보다 빠른 속도로 해변 가의 철길을 달려간다 싶더니 들길, 산길, 철교, 터널을 지나 여러 도시를 거처 그날 밤 초저녁, 오오사카(大阪)역에 도착하여 아버지의 영접을 받았다. 고향 떠난 이틀 만이고 이산가족이 된 지 수년만의 즐거운 상봉이었다. 부모님은 할머님에 대한 효심의 발로로 손자들의 고향방문을 허락한 것이다. 어린이들만의 여행이란 상상을 초월한 조치인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1942년 8월) 여름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한참 호기심이 많던 때, 6학년 형과 나 단둘이 고향을 찾았다. 고향을 떠나온 지 3년 만에 매우 신기하고 즐거운 왕복도선(渡船)여행이었다. 재학생이라 학교장 증명만으로도 여행이 가능했다. 지난번과는 달리 마음이 몹시 설레는 길이었다. 그간 학습과 성장 탓도 있겠지만 그간 여름철이면 해수욕장을 드나들던 처지라 바다를 좀 알게 된 것이다. 일본은 해양국가이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바다와 가까이 지내도록 교육적 배려를 많이 했다. 올해는 해수욕장이 아니라 고향방문이었다. 다행이 귀국선편이 한낮 항해라 처음부터 갑판에 올라 바다바람을 맞을 수 있었고, 망망대해를 처음 바라보았다. 이곳이 현해탄이란 것도 안 것이다. 갑판에서 대마도를 보았고, 멀리 바다에 떠 거무스레 보이는 조선반도 땅도 바라볼 수 있었다. 외롭게 나뭇잎처럼 떠가는 연락선에서 또 다른 배를 맞을 때면 친근감이 들어 반갑기 한이 없었고 외로움을 달래주기도 했다. 더구나 전시(일명: 대동아전쟁)라 뱃머리에 장착한 대포들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앞섰지만 나로서는 참으로 즐겁고 낭만적인 뱃길여행이었다. 네 번째는 생전에 잊을 수 없는 귀국뱃길(1945년.11월)이었다. 당시 우리가족은 일본군 군속으로 중국전선에 징용된 형과 이산가족이었다. 아버지께서 작별한 지 수년인 큰아들을 귀국해야만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젖어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서 온 작은 어선을 귀국선삼아 귀국을 결심한 것이다. 이때는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던 동포가 많아 연락선을 타고 싶어도 탈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이 배는 부산에서 일부러 자기네들이 가족들을 데리러 일본까지 온 배였다. 예고 없는 갑작스런 귀국이라 빈 몸으로 며칠 먹을 식량과 취사용구만 마련하여 고오베(神戶)항에서 우리 가족 5명이 탔다. 이미 30~40명가량이 타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 고향 시골집 사랑방 갓집에서 본 듯한 태극기가 나부끼는 통당선이었다. 가을 날씨에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유람선을 탄 분위기속에 기분 좋게 세도나이가이(瀨戶內海) 잔잔한 바다를 달려 히로시마(廣島), 시모노세끼(下關), 모지(門司)를 거쳐서 이기(壹岐)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멀리 보이는 섬이 쓰시마(對馬島)다. 이제까지 날씨가 매우 좋았다. 현해탄을 건너려면 바람 없고 날씨가 아주 좋아야 한단다. 다행이 가을철이라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어 대마도에도 무사히 상륙했다. 대마도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서북쪽에 거무스레 보이는 것이 한국 땅이란다. 그날도 매우날씨가 좋아 점심을 먹고 출발했다. 큰 연락선을 타고 다니던 터라 매우 마음이 불안했지만 믿고 갈 수밖에 없었다. 떠나온 섬이 점점 멀어지니 파도가 거세지고 배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모두 점점 긴장된 모습이었다. 일행들도 말없이 침묵이 이어지고 머리끝이 곤두섰다. 초초한 항해가 계속된 것이다. 그런데 돌발 사건이 벌어졌다. 엔진이 꺼지더니 통당 소리도 끊어졌다. 배는 요동치고 파도는 더욱 거세어져 배 안으로 물을 뿌려댔다. 겁에 질려 “아이쿠! 이제 죽었구나!” 초 비상사태였다. 엔진이 꺼지니 배가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다행히 잠시 뒤 통당 소리가 살아났다. 승객 모두의 숨소리도 살아난 것이다.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현해탄 물귀신을 면한 순간인 것이다. 이렇게 한고비를 넘기고서야 부산항인 영도에 상륙했다. 승선한 지 며칠 만인가? 땅을 밟으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기우뚱 거렸다. 현해탄을 네 번째 건너는데 마지막 번에 혼비백산 죽을 뻔했으니 죽음의 현해탄이 될 뻔했던 것이다. 이후 나는 배타기를 아주 꺼렸다. 나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많은 동포들이 온갖 사연을 안고 이 바다를 오갔다. 광복 직후 이 바다에서 조난을 당하고 불귀의 영혼이 된 넋이 얼마이던가? 한때의 혼란기라 정확한 실태도 파악 못한 실정이란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 등 현해탄에 관한 영화가 제작될 만큼 예부터 우리민족은 각자 체험한 희비에 따라 사연을 많이 간직한 민족이다. 새삼 일생을 살면서 한때의 체험을 되새겨 보았다. 일본은 이따금 독도를 억지로 거론한다지만 역사적으로 엄연히 독도나 대마도는 한국영이란다. 이곳은 국경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국경이 되어버려 아쉬움이 따른다. 시대는 바뀌어 한일양국은 이웃으로 바다의 항해보다 하늘의 항공시대가 열렸다. 양 국민들은 계속 많이 넘나들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나의 현해탄이 아니겠는가? (2009. 7. 10.) ※ 光復直後(8.24) 歸國船 浮島丸 迷宮 事件 부도환(우끼시마마루) 폭파 대 수장 사건(浮島丸 爆破 大水葬 事件)이란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직후 귀국시켜야 할 많은 우리 징용청년들을 실은 배에 일본정부가 저지른 만행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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