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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어머니/양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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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599회 작성일 10-12-29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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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어머니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양희선 내가 살던 곳은 모악산과 황방산이 드리워진 마을이다. 옥토가 풍요롭고 전주천이 유유히 흐르는 곳, 온화하고 양지바른 전주 근교다. 동네가 그리 크지 않아 이웃사촌처럼 오순도순 서로 의지하며 일손도 함께 하였다. 오형제 중 막내인 아버지에게 시집온 어머니는 시어머니와 윗동서들과 큰집에서 오랫동안 함께 사셨다. 몇 년 뒤 논 몇 마지기를 살림밑천으로 분가하게 되어 제일 큰집을 중심으로 둘째, 셋째, 넷째, 막내인 우리 집 순으로 사촌들까지 옹기종기 모여 의좋게 살았다. 우리 집은 아늑하고 포근한 남향 초가(草家)로 큰방과 윗방이 있고, 가운데에 부엌과 고방이 나란히 있었다. 사랑채는 오빠들의 공부방이었다. 어머니는 부엌과 광을 안방처럼 드나드셨다. 어쩌다가 광문이 열려 살짝 들여다보면 큰 쌀 항아리와 보리쌀 뒤주, 올망졸망 담겨있는 콩, 팥, 녹두 등 여러 잡곡들은 부모님의 피와 땀이었다. 농사꾼은 고달픈 직업이다. 오직 근면 성실로 흙과 함께 사셨다. 파고 또 파고 심으면서 한시반시 쉬는 날이 없었다. 언제나 지친 기색 없이 밭에 나가 일을 하셨다. 농사철에는 점심과 새참 준비로 동분서주하며 많은 일꾼들을 접대하느라 피곤도 잊으셨다. 땅에서 얻어지는 곡식 한 알도 소중하게 여겼다. 농촌에서 돈이 되는 것은 오직 곡식뿐이었다. 단돈 5원을 아끼려고 시내좌석버스를 마다하고 입석버스를 타신 근검절약하신 어머니셨다. 아버지는 손재간이 좋으셨다. 고장 난 기계도 손만 대시면 잘 돌아갔다. 어렸을 적 아버지께서 농사철이 되면 며칠씩 집을 비우는 일이 더러 있었다. 잘 모르지만 논에 물을 품는 발동기 일을 하신다고 들었다. 자녀들의 학비를 마련하려고 사방을 누비며 일을 하신 모양이었다. 밀린 학비 독촉 때문에 나는 몇 번씩 불려나가 창피하였으나 집에 와서 차마 말문을 열지 못했던 그 옛날이 잊히지 않는다. 어머니는 뜬 새벽에 조왕에 정화수를 올리고 마음을 모아 치성을 드리고 아침을 시작하였다. 밤늦도록 일하고 먼동이 트기 전 도시락을 준비하고 서둘러 아침을 먹여 보낸 긴긴 세월은 하루도 어김없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이리(익산)로 기차통학을 하는 큰아들에 대한 정성은 어머니이기에 해낼 수가 있었다. 9남매 모두가 기차시간에 쫓겨 아침은 북새통으로 도시락을 챙기고 밥을 먹기에도 바빴다. 입었던 옷을 이곳저곳 팽개치고 썰물처럼 빠져나간 뒷설거지를 엄마 몫으로 남겨놓은 채 등교했던 철부지들이었다. 막내딸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 분주했던 어머니의 기나긴 삶은 고달프고 힘든 세월이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는 한글만 깨우치셨다. 어렵던 시절 많은 고생하면서 자식만은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고난을 낙으로 삼은 선견지명이 있는 지혜로운 부모님이셨다. 두 분은 신념이 확고하여 생각과 말씀이 어긋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끼고 극진히 사랑하셨다. 우리 형제자매는 부모님을 닮은 착한 성품을 지녔고 우애하는 것을 배웠다. 동네에서 행복한 가정이라고 모두들 부러워 하였다. 아들딸을 출가시켜 며느리를 맞으니 이젠 편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밀려오는 시대의 변화로 새바람이 불어왔다. 다세대가 모여 섬기고 받들던 구시대와 신시대의 핵가족을 이루는 풍조로 시대적 흐름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려니 체념하면서도 나이에는 어쩔 수 없어 어머니는 차츰 삭정이처럼 사위어갔다. 원래 입담과 붙임성이 없고 조신하신 속정이 많은 어머니셨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못 마시는 술을 드시고 만만한 아버지에게 푸념을 하면 허허하고 웃어넘기셨던 소탈한 아버지였다. 농사는 자식농사가 제일이란 말이 있다. 우리 부모님은 많은 자식을 키웠으니 부자라고 할 수 있을까? 겉으론 행복했을지 모르나 그 속인들 어찌 편했으랴.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고 키워놓으면 저절로 자란 줄 알지 않던가. 자식은 품안의 자식이라고 했다. 짝 지우면 뿔뿔이 제 갈 길을 찾아가니 부모들은 우렁이 껍데기가 되고 마는 것을……. 많은 자식 다 출가시켜 무거운 짐 벗고 편한 여생을 보내리라 여겼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냥두지 않았다. 건강했던 어머니가 서서히 아프기 시작했다. 위암이었다. 아버지의 지극한 간호도 물거품이 되었다. 정정하고 건강하시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외로움과 허탈감으로 상심하시더니 어머니가 작고한 뒤 4개월 만에 어머니를 따라가셨다. 어머니는 74세, 아버지는 71세로 아직은 정정하실 연세인데 자식 뒷바라지에 고생만 하시다가 자식들의 호강을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오늘따라 두 분이 몹시 그립다. (2010.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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