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숫자가 아니다(2)/김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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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숫자가 아니다(2)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하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김상권
오늘은 연금을 받는 날이다. 다시 말하면 정년퇴직 이후의 내 봉급날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은행에 갔다. 우선 번호꽂이 통에서 접수번호표를 뽑았다. 95번이었다. 내가 뽑은 95번이 오늘의 나를 대신한다. 의자에 앉아 작은 전광판에 95번이 뜨기를 기다렸다. 작은 전광판에 내 번호가 뜨자 창구로 가서 통장을 내밀고 비밀번호를 누른 뒤 돈을 찾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딩동’하며 '몇 번 손님'하고 번호를 불렀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도 생략하고 ‘딩동’하는 소리와 함께 번호만 뜬다. 기계적이고 사무적이다. 그들에게 나는 '95번'에 불과하다. 번호표를 뽑는 순간 나 '김상권'은 숫자 '95번'으로 바뀐다.
'11310731', 나의 군번이다. 주민등록번호나 휴대전화번호가 가끔 생각이 나지 않아 쩔쩔맬 때가 있었지만, 군번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군번을 받은 지가 46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군복무시절 저녁점호 때 주번사령관이 “너!”하고 가리키면 “네, 11310731번 김상권 일병!” 하고 대답한 것이 머리에 박혀 버린 게 아닐까 싶다. 그때는 군번이 나를 대신했었다.
시내버스 행선지도 번호로 표시한다. 버스 앞뒤와 옆에는 커다란 번호가 붙어 있다. 그 밑에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이, 그 사이에 경유지가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번호가 곧 행선지 표시다. 번호를 알면 망설이지 않고 버스에 오를 수 있다.
운동선수에게도 번호가 부여된다. 프로선수의 경우 셔츠 앞가슴에는 소속팀의 회사이름이, 뒤에는 이름과 번호가 쓰여 있는데 이름보다 등번호가 훨씬 더 크다.
100년 가까이 사용해온 지번주소가 2012년 1월 1일부터 도로명주소로 바뀐다. 도로에 이름을 붙이고 이를 기준으로 좌측은 홀수, 우측은 짝수로 건물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가령 우리 집주소의 경우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1가 636번지 제일아파트 1동 402호가 전주시 완산구 신봉로 52, 1동 402호로 바뀐다. 27글자가 17자로 줄어드니 얼마나 간편한가.
집 전화번호, 휴대전화번호, 차량번호, 우편번호, 아파트호수 등 우리는 수많은 번호를 외우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그들 번호가 내 뜻에 따라 정해진 것이 아니라 관리하기 쉽게 정해진 번호인 것이다. 내가 선택한 번호는 통장이나 인터넷 비밀번호뿐이다. 내 뜻이든 아니든 번호는 단지 번호일 뿐이지 나는 아니다. 그런데도 숫자가 나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신청곡을 받아 음악을 들려주는 라디오프로그램이 있다. 이때 담당자는 신청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휴대전화번호 끝자리 네 지리수를 부른다. 이를테면 '9716님이 신청한 노래입니다'라고 한다. 이 경우도 숫자가 그 사람을 대신하는 셈이다.
내가 아는 K선배는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 그 비결을 물었더니 자기 수업을 받는 학생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어디서나 만나면 늘 이름을 불러주었을 뿐이라고 했다.
전에 같이 근무했던 어느 여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수필집을 받고 너무 기뻐 사흘 만에 다 읽었다고 했다. 오랜만의 통화여서 대화가 길었다. 나는 그 여선생님의 아들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물었다. 중학교 3학년이라고 했다. 그 아이는 내가 근무했던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벌써 중학교 3학년이라니, 세월이 참으로 많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선생님은 자기 아들이름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느냐며 무척 기뻐했다. 뜻밖이었던 모양이다. 아들의 책꽂이에 내 수필집을 꽂아놓았다고 했다.
간편함을 선호하다보니 이름 대신 약칭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가령 YS, DJ, MB는 전‧현직 대통령들의 이름을 나타내는 약칭이다. 먼 훗날 사람들도 이 약칭을 알 수 있을까.
숫자를 좋아하다보면 앞으로 부부 사이의 호칭도 번호로 부르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아내에게 번호를 부여하고 가령 남편이 1번이고 아내가 2번이라면 남편이 부인을 부를 때 2번,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 1번이라고 부르는 웃지 못 할 촌극이 벌어지는 시대가 아니 온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요즘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는 어느 연속극을 보노라면 젊은 부부사이의 대화 가운데 눈에 거슬리는 장면이 나온다. 부인이 남편을오빠!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기야 한때는 텔레비전 대담에서도 남편을아빠!라고 부르는 여성이 있어 눈살을 찌푸린 적도 있었지만.자기나여보같은 좋은 호칭이 있는데도 굳이오빠라고 부르는 건 바람직한 호칭이 아니지 싶다.자기나여보라고 부르기가 쑥스럽다면 이름을 부르면 좋지 않을까. OO양, OO씨라고 부르면 우선 정감이 가고 친밀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더 사랑스럽고 다정할 것 같다.
우리에겐 이름이 있다.
거기에는 그렇게 자라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런 이름을 두고 숫자로 부르고 번호로 취급해버리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도 내게로 다가 와 꽃이 되었다는 어느 시구를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싶다.
(2010. 10. 25.)
*YS(김영삼) *DJ(갬대중) *MB(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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