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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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창 竹槍
전주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이의민
며칠 전 저녁을 먹고 뉴스를 보려고 거실 쇼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에는 죽창처럼 큰 대나무를 든 시위 군중들 수백 명이 전경들과 마주선 장면이 화면에 나타났다.
6·25 한국전쟁이 끝났는데도 밤이면 인민공화국 낮이면 대한민국이던 때가 있었다. 치안대가 활동하던 우리 고장은 밤에는 총을 든 인민군 두어 명이 앞장서고, 그 중간에는 죽창을 든 20여 명이 늘어섰으며, 맨 뒤에는 총을 든 빨치산 한 명이 무리를 지어 출몰했었다. 그 무렵 지리산 공비를 토벌하려고 우리 국군과 경찰이 많이 투입되었고 죽기도 많이 죽었다. 막바지에 몰린 인민군 지방 빨치산들은 밤이면 죽창을 들고 민가로 내려와 소와 닭들을 잡아갔다. 쌀, 보리, 소금, 된장, 간장 등 먹을거리를 가져가던 시절, 나는 지금 완주군 구이 저수지를 막기 전에 저수지를 가로질러 구이국민학교에 다닐 때였다. 일명 굴먹이재라는 작은 고개가 있었는데 좁은 오솔길을 넘으면 모래사장이 있었다. 거기에 지방유지들이 죽창에 찔려 학살당한 모습을 보기도 했었다.
그중에 우리 반 담임선생님도 섞여 있었다. 죽창은 튼튼한 대나무를 사람 키 두어 배 크기로 잘라 끝을 날카롭게 만든 뒤 불에 살짝 구워놓은 무기다. 모래사장에 죽창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시체 위에 파리들이 윙윙거리며 몰려들었고 모래도 설설 뿌려 놓았었다. 사람들의 손을 뒤로 돌려 철사 줄로 묶어놓고 잔인하게 죽창으로 찔러 학살했던 것이다. 참으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현장이었다.
지금도 나는 죽창만 보면 소름이 끼친다. 그런 대나무가 텔레비전 화면에 보이니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고 으스스소름이 돋았다. 학살당한 담임선생님 아버님께서는 면장을 지내신 어른으로 우리 근동에서는 존경받는 유지 어르신이셨다.
집안 대대로 농사도 많이 짓고 부자로 살면서 머슴도 여러 명 두고 없는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고 소작도 골고루 나누어 주어 인심을 크게 잃지 않고 사는 집안이었다. 그분의 아들이 선생님으로서 큰 죄를 지은 일도 없었는데 학살당한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집에서 머슴을 살다가 6·25때 빨갱이의 앞잡이가 되어 날뛰던 사람이 끌어다 몹쓸 짓을 했다고 소문이 났었다.
6·25 전까지는 왜놈들한테 핍박을 받으며 배 고프게 살았다. 보릿고개도 있었지만 이웃끼리 개떡이나 쑥버무리라도 만들면 나누어 먹고 초상이 나면 온 동네사람들이 힘을 합쳐 장사도 치르고 혼사가 있으면 콩나물을 미리 길러 동이째 내놓고, 계란 한 줄, 국수 한 뭉치를 축의물품으로 전하며 살았다. 한가히 농사를 지으며 개, 돼지 한 두마리를 키우고, 닭도 마당에서 기르며 평화롭게 살던 그 시절이었는데 김일성이가 6·25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우리끼리 군인가족이라고, 경찰가족이라고, 부자로 살았다고 죽였다. 또 6·25때 부역을 했다고 죽이고, 빨치산이 되어 산으로 숨어들고, 동족끼리 원수가 되어 한 맺힌 세상을 살았던 것이다.
그때 그렇게 소름이 끼치던 죽창 비슷한 게 서울 한복판 시청앞 광장에서 난무하는 것을 보니 그때 옛날의 죽창이 떠올랐다. 상상하기도 싫은 6·25, 이제 그런 죽창이나 죽봉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지금 중병에 걸린 듯싶다. 10여년의 햇볕정책으로 전쟁은 멀리 간 듯 생각한다. 북한이 핵폭탄을 만들고 미사일을 쏘아대는데도 꿈쩍도 않는다. 설마 전쟁이 일어나겠느냐 하고 휴전선이 없는걸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악랄한 북한은 믿을 수 없는 망난이다. 언제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공산당들이다. 우리는 만반의 준비로 북한이 도발하면 즉각 퇴치할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아침 안개가 자욱하고 밥 짓는 연기가 한가로이 피어오르는 평화로운 옛 고향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서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닐까?
(2009.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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