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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 이어준 인연/윤석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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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574회 작성일 10-09-1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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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 이어준 인연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윤석조 중등학교를 실업계 중ㆍ고교에서 공부한 나는 40여 년을 과학 선생으로 살다 퇴직하였다. 문학과는 먼 길을 걸었던 사람이 어느 날 문인(文人)으로 변신하였으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대학 동기동창 모임의 총무가 되어서다. 모임 때마다 안내문을 발송해야 하는데 글은 내가 만들었지만, 문맥이나 맞춤법, 띄어쓰기 등은 국어 선생님들께 수정(修訂)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국어 선생님들은 그걸 교정해 주면서 ‘교장 선생님 때문에 국어 선생 어렵게 되었다’는 등, 듣기 좋은 농담을 하여 함께 웃기도 했었다. 안내문을 받아 본 친구들이 그 안내문에 대하여 칭찬해 줄 때는 은근히 자부심도 생겼다. 더구나 사모님이 내 글귀를 칭찬한다는 농담에 나도 일찍 글을 썼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고희(古稀)가 4년 남았을 때 전주시민대학 문예창작반에서 K교수의 문학 창작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서점과 헌 책방, 출판사를 들락거리며 문학 입문 서적들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수필에 관한 책으로 윤모촌의<수필을 어떻게 쓸 것인가>와 정주환의<현대수필 창작 입문>, 정진권의<한국 수필 문학 연구> 등등의 책들을 틈틈이 읽고 적으며 수필가가 되려는 꿈을 꾸었었다. 대둔산 축제(2001.10.) 때 단풍 구경이나 하려고 <온글문학> 문우들을 따라 갔었다. 한 쪽에 앉아 문우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는데 글짓기 주제 다섯 개가 발표되었다. 그 중에 ‘아버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미워했던 아버지’가 생각나 울 수밖에 없었다. 쓰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면서 얼룩진 원고지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제출하고 목욕탕에 들어갔다. 갈 시간이 되어 밖에 나오니 수상식은 끝났는지 일행들이 나를 찾고 있었다. 내가 금상 수상자라며 상장과 상품을 대리 수상한 어느 문우가 건네주어 어안이 벙벙했다. 시민대학을 수료하고서도 온글문학 동아리 반에서 K교수님의 문예창작 지도를 계속 받았다. 연말이 가까워지자 계간 《문예연구》의 ‘신인문학작품 공모’ 광고를 교수님이 복사하여 나눠 주었다. 공부하며 써 놓았던 수필로 아무도 모르게 응모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공무원 문학》과 《대한문학》에도 응모하였다. 운이 좋았는지 《문예연구》에서 <되찾은 봉급날>로 신인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다른 두 군데 문예지에서도 등단이란 영광을 안았다. 잃어버린 보물을 찾은 것 같았고, 기분은 풍선처럼 둥둥 떴었다. 문인으로 알아주는 것만도 고맙고 자랑스러운 일인데, 모임 때마다 수필집을 만들어 달라는 제자(전라고 12회 3ㅡ5)들의 부탁이 있었다. 겁도 없이 첫 수필집 《노을빛 사랑)》이 영광스럽게 제자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나를 지도하시는 교수님들(이기반, 김동수)을 모시고 봉정식과 함께 분에 넘친 고희잔치까지 제자들로부터 받았다. 언감생심(焉敢生心) 염치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선생이란 내 과거가 떳떳하고 자랑스럽기만 하였다. ‘말을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는 우리 속담처럼 두 번째 수필집 《커플 반지》도 만들었다. 내 수필집을 읽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다 읽었다’, ‘지금도 수필을 쓰고 있느냐?’ ‘언제 수필 공부를 하였느냐?’ 등등의 칭찬과, 격려를 해 줄 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또 이 수필집으로 평생 두고두고 잊지 못할 자랑거리도 생겼다. 목포상고로 초임 발령을 받아 몇 달 근무할 때, 5ㆍ16 군사혁명이 일어났고 군(軍) 미필자로 해직되어 군에 입대하였다. 제대하여 복직한 곳이 영암군 군서고등공민학교(현 구림중학교)였다. 내가 담임을 맡았던 전철수 군은 2학년이었는데 학생들과 정이 들었었다. 그곳은 마치 초임교사 시절 같은 곳이 되었다. 철수는 광주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 나는 고흥농고로 전출되었다. 고흥에서 2년 동안 근무하면서 철수 군의 편지와 구림중학교 제자들의 편지 속에 담긴 정(情)을 받으며 구림 제자들의 소식을 듣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인심 좋은 고흥에서 오래 살고 싶었는데, 2년이 지나자 광양농고로 전출되자 구림중학교 제자들의 소식도 끊겼다. 또 2년 뒤 전남 동부 6개 군에서 제일 좋다(순천고 학생들의 말)는 순천고등학교로 전출되었지만, 언제나 타향으로 떠돌이가 될 것만 같아 전북으로 근무처를 옮겼다. 장수교육청 장학사로 근무할 때 조달청제주지사에 근무하는 철수의 전화를 받았다. 철수가 나를 찾기 위해 여러 차례 전북도교육청으로 연락한 사실과, 교사 명단에 없는 나를 장학사 명단에서 찾아 철수에게 연락해준 분의 친절 덕이었다. 그때 철수는 어머니도 살아계시고 동기 동창과 결혼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며칠 뒤 제주 특산물인 한약재와 버섯. 마른 수산물이 든 큰 소포가 교육청으로 배달되어,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었다. 그리고 또 내가 전근이 되자 또 소식이 끊겼다. 졸작 《노을빛 사랑》을 철수에게 주고 싶어 조달청전주지사를 찾아갔다. 제주지사에서 절수와 같이 근무했었다는 친절한 직원의 도움으로 철수가 ‘한국철도공단 건설본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 자리에서 통화를 하고 바로 수필집을 보내 주었다. 그동안 두어 차례 전화만 오갔던 그 제자가 고향 영암에 왔다가 대전으로 가는 도중 전주에 들르겠다며, 고속버스 정류장에서 아내랑 함께 만나자고 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도 이동전화로 연락하여 만났다. 키도 훌쩍 크고 얼굴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야 철수를 포옹(抱擁)하며 그리운 얼굴을 확인하였다. 주차된 곳에 가 또 다른 제자를 만났는데 역시 모르는 부인이었다. 자세히 보니 눈가에 옛 모습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다, 철수 부부가 돌아가면서 우리 부부에게 커플반지를 끼워주어 너무 감격스러웠다. 끊긴 인연을 수필이 다시 이어준 것이다. 이때 구림중학교 제자들의 소식을 많이 들었다. 군산여고에 근무할 때 전주시청에 근무하며 나를 찾아준 제자가 광주시청 여성정책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공고만 졸업하고 한전(韓電) 이사가 되었다는 다른 제자의 소식도 들었다. 내 누님의 이름과 같아서 누님이라고 부르던 새침떼기 소녀도 연락되더니, 여름이면 해마다 화순 복숭아를 보내주어 옛날 추억을 떠오르게 하여 나를 젊은 날로 되돌려주기도 한다. 살아가는 동안 수필의 품에 안겨 살아가고 싶다. 쌀로 지은 밥이 수필이라면 쌀과 누룩으로 빚은 술은 시나 소설이라고 했던가?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밥 같은 수필을 쓰고, 수필이 만들어 주는 인연과 더불어 즐겁게 여생을 살아가고 싶다. (2010.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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