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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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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758회 작성일 09-06-0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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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看板)장이 전주안골뇐복지회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이의민 지지리도 못살고 가난하여 못 먹고 못 살던 시골생활이었다. 중학교도 다니다 접고 전주 넷째 작은 아버지 집으로 옮겨 일을 배우고 있었다. 작은 아버님은 이름 난 하반영 화백님이 전주도립극장에서 영화선전간판을 맡아 그릴 때 그 밑에서 조수로 일을 배운 분이다. 그러다가 독립해서 여객버스자동차를 색칠하는 도장사(塗裝士)로 일하셨다. 나는 그 밑에서 페인트 다루는 걸 배웠다. 오후 4시만 되면 전주극장에서 친구가 영화 간판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곳에 자주 놀러 다니다가 친구 주인의 허락 아래 그림을 1년여 공부하니 작은 간판을 그릴 수 있었다. 긴 막대기에 분필을 묶어 덧칠해놓은 작은 캔버스에 간판 뎃상을 하는데 주름이 많은 황해나 늙은 배우는 그리기가 쉬워도 예쁜 젊은 여배우는 그리기가 더 어려웠다. 재미있게 그려놓으면 꼭 닮게 잘 그렸다고 칭찬받던 시절,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하니 작은 집에서 주는 쥐꼬리만한 월급은 집으로 보내면 그만이니 목돈은 언제 만들며 장래에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작은집 옆에 살던 친구를 따라 서울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우리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며 작은 아버님한테 장문의 편지 한 통을 써놓고 상경하였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서울에서 직장을 쉽게 얻을 수는 없었다. 서울에서 사귄 강이라는 친구와 셋이 어울려 다니다가 가지고간 돈도 거의 떨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차에 강이란 친구가 자기 고향 청주로 가자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무얼 할 줄 아느냐고 다그쳤다. 그래서 간판을 조금 그릴 줄 안다고 했다. 청주로 내려가서 친구가 잘 아는 간판집 전 씨를 소개해 주었다. 간판집에서는 목수도 되고, 함석을 다루는 부렠기아도 되어 간판을 제작하면서 1년여 세월을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한문간판을 한글로 고쳐야 한다는 정부의 시책이 발표 되면서 나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전 씨 간판집에서 나와 하숙집을 정해놓고 친구 강과 칠쟁이 친구 하나를 데리고 한문간판을 한글로 고쳐 돈을 벌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강제로 언제까지 기한을 정해 한글로 고쳐야할 간판이기에 한문간판을 떼지 않고 네 발 달린 사다리를 양쪽에 세워 놓고 널빤지를 올려놓아 거기에 올라서서 칠하고 한글로 간판을 고쳐 나가는 작업을 그리 어렵지 않게 하노라니 수입이 짭잘했다. 6개월간 돈을 벌고 일자리가 줄어들 무렵, 마침 조 씨라는 분이 새로 칠집과 간판집을 차린다며 나더러 월급장이로 와 달라고 했다. 그때 월급은 4,000원(쌀 두 가마 값)을 받고 월급장이로 들어갔다. 극장에서 배운 그림솜씨와 6개월간 한문을 한글로 고치는 작업 중에 그림과 글씨 쓰는 노하우가 생겨 청주 바닥에서는 잘 나가는 간판기술자가 되었다. 3년여를 명절에도 집에 내려가지 않으니 어머니께서 막내 여동생을 업고 찾아오시기도 하셨다. 그때 나는 무슨 예술가라고 머리도 일 년에 두어 번 깎은 장발로 쪽 바가지 베레모를 비뚤어지게 쓰고 다니며 지독한 돈 벌레가 되어 있었다. 그러자 5·16혁명 후 화폐개혁이 됐다고 은행에서 돈을 새 돈으로 바꾸어야 한다는데 한 번에 많이 바꾸어 주지 않고 얼마 한도가 있어 걱정이 되었다. 할 수 없어 동네 아는 아주머니들과 근처 시장 장사꾼 아주머니들에게 얼마의 품삯을 주고 돈을 바꾸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총각이 어찌 그리 많은 돈을 모았느냐며 부러워 하였다. 근 10여년 죽을 고생도 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아끼고 모은 돈은 나로서는 목숨보다 더 귀한 돈이었다. 그 후 어느 가을, 어머니도 다녀가신 뒤라 이제 집으로 내려가 집안 식구들을 돌보며 죽을 먹건 밥을 먹건 함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주로 내려왔다. 그 때 모은 종자돈으로 다른 사업도 하여 1966년엔 집도 장만하고 장가도 들었다. 새로운 사업도 순조롭게 잘 되어 지금까지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안하고 살고 있고, 아들딸 셋을 대학까지 마치고 취직을 시켜 시집장가도 보냈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은 참으로 옳은 이야기였다. 내가 젊어서 고생을 했기에 노후를 즐길 수 있는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2009.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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