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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을 그리워하며/정장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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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569회 작성일 10-02-03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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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을 그리워하며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정장영 형은 나보다 두 살 위로 1928년 음력 1월 9일생이다. 형(정기영)은 나보다 영리했고 정결하며 깔끔한 성품으로서 조숙한 편이었다. 큰아버지께서 아들을 늦게 두셨기에 양자로 드리겠다고 벼르고 내외분이 매우 아끼고 귀여워하셨던 형이었다. 늦게나마 종제를 두게 되어 양자로 가기를 면했지만 할머니께서는 애지중지 여기셨다. 나는 서운한 점도 많았다. 우리 집 장남이다 보니 부모님께서는 모든 것이 형 우선이었다 할까?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라지만 옷은 물론 학용품까지 물려받아 쓰고 새것은 내게 어느 것 하나 돌아오지 않았으니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 크고 작은 사소한 심부름 까지도……. 1939년 형이 3학년, 내가 1학년 때 나와 같이 일본 오사카시(大阪市) 남구소재 초등학교(日本橋尋常小學校)로 전학했다. 공부도 잘했고 글씨체가 좋아 글도 잘 지었다. 중등학교는 이공계를 졸업하였다. 15살에 그 어려운 무선통신사 자격증을 땄지만 세상과 때를 잘못만나 졸업하자마자 일본군 군속으로 징용당해 만주를 거처 북경, 남경, 남지나전선에 투입되더니 양쯔 강 중류인 한구(漢口)까지 끌려갔다. 그러나 참으로 효자였다고나 할까? 집을 떠난 뒤 부모님을 위안시키기 위해 주말마다 집으로 문안엽서를 보내 주었다. 형의 삶이야말로 구사일생의 역경이었다. 형이 지은 시 한 편을 보자. 오직 귀국의 염원과 여정을 표현한 시다. 광복군 제3지대-처음 보는 태극기 8‧15 민족 해방/ 그 기쁨과 새 역정 시작/ 우선 조국의 품 고향/ 태극그림 그리운 집/ 부모 형제 사랑의 품에 안겨야 하리/ 한구에서 큰 도하선 빌어 승선/ 남경까지 9사1생 항해 길에 오르도다/ 항해 중의 수많은 희생 중경에서 떠내려 오는/ 기뢰와 부딪쳐 앞뒤에서 배가 폭발 침몰하는 참사라/ 남경도착 다시 북경까지의 북상 길 싸움시작/ 굶주림의 3개월 겨울 혹한 전 북경도착 목표로다/ 한 달 남짓 행군 끝 제남도착/ 광복군 제3지대 요원들의 영접/ 반가움 환희의 첫 대면 태극기 물결/ 핑-도는 눈시울 말없는 조국에의 충성 서약/ 처음 보는 태극기 그 극은 청홍색이요/ 모양 같은 갓집 태극은 흑백이로되/ 그 내뿜는 민족정기는 똑같음이어라/ 간곡한 제3지대 입대 요청 권유/ 눈물로서 사양 먼저 고향 찾아 본 연후/ 다시 찾겠노라 기약 없는 약속/ 북경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도다" 중국 한구에서 일본군 비행장 근무 때 남 몰래 당시 버마(미얀마)국의 란궁 미영연합군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듣고 탈출, 갖은 역경과 고생 끝에 광복군에 입대했다. 1946년 당당히 광복군의 일원으로 귀국했다. 처음 부산방송국에 취직했지만 무슨 사연인지 적응을 못하고 고향인 전북으로 돌아와 전주측후소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전라북도 경찰청(1947) 통신업무 책임자(경사)로 발탁되어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전라북도 경찰청 통신망 구축에 이어 남원, 장수, 순창경찰서 통신주임(경위)으로 경비통신(유무선)정비에 노력했고, 순창경찰서 근무 때 6‧25인 한국전쟁을 맞았다. 결국 3개월 동안 산에서 피신생활을 했으니 그간의 고초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복 뒤 본청, 남원, 장수, 순창경찰서 근무 중 여러 차례 공비의 기습을 받았다. 특히 전남 담양군 금성지서와 전북 순창군 금과지서 중간지점 국도에서 차량기습공격으로 일행 중 홀로 살아남을 정도로 기적 같은 일도 겪었다. 그 충격으로 건강이 나빠졌고 결국 공직에서 자진 사퇴해야만 했었다. 형은 조숙해서 그랬던지 당시 관습이었던지 20세에 혼인을 해 4남 2녀를 두셨다. 일직 세상풍파에 시달렸고 경험이 많아 두 살 아래인 나를 격변의 난 와중(渦中)에서도 부모님보다 더 잘 이끌어 주셨다. 내가 중등교육을 받고 교직생활을 하게 된 것도 모두 형이 뒤에서 배려해 준 덕이었다. 형은 책상머리에 항시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란 표어를 써 붙이고 공부를 했다. 일본에서 중등교육을 받을 때에는 왜경(倭警)의 소년계 형사들의 사찰대상이 되기도 해, 주말마다 그들이 우리 공부방을 방문했었다. 군속으로 징용된 뒤는 나도 가끔 형사계에 불려 다닌 기억도 난다. 뒤늦은 문학공부를 하여 시인(월간: 한국시)으로, 아동문학(계간: 백두산문학)가로 등단하여, 시인 겸 아동문학가로 활동하면서 《빛은 동방으로부터》란 저서도 남기셨다. 한 때 퇴직 직후 고향인 순창군 적성면에서 임시 공민학교를 마련하여 교육 사업을 하기도 했고, 순창고등학교의 전신인 순창고등공민학교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었다. 건강 회복을 위해 수양삼아 개신교인 장로교에 입문했지만 성경탐구에 몰두하여 P장로교로 옮기더니 전도사로 발탁되어 전국각지 교회개척에 노력했었다. 한때 불운한 동생의 요절로 팔자에 없는 장사를 이어받아 순천에서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재복이 없었던지 어려운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말년에는 교주와 교세가 약해져 새로운 교파인 OO교에 옮겨 역시 전도와 교회개척에 헌신하다 75세(2002)에 이승을 하직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젊은 시절의 온갖 고초와 9사1생의 역경은 수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나 할까? 나는 나이가 들수록 형님이 사무치게 그립다. (2010.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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