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김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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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장 목요반 김상권
나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오늘부터 담배를 끊겠다고 다짐했지만 말뿐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베란다로 나가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론 ‘끊어야지, 끊어야지’ 한다. 이런 일이 날마다 되풀이 된다.
부모님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담배를 모르고 자랐다. 군에 있을 때도, 학교에서 근무할 때도 담배라는 걸 몰랐다. 그러다 40대 후반부터 담배에 손을 댔다. 본격적으로 피우기 시작한 것은 7, 8년 남짓 된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 는 우리나라의 속담처럼 내가 바로 그 꼴이다. 나는 담배 피운지가 오래 되지 않았고 뻐끔담배라는 것을 핑계 대며 계속 피운다. 며칠 동안 끊은 적도 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정말 담배를 끊고 싶다.
나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또 하나 있다. 군 시절에 종종 기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었다. 내가 학교로 돌아가면 절대로 체벌은 하지 않겠다고. 그러나 숙제를 안 한 아이, 성적이 안 올라간 아이, 규칙을 어긴 아이를 어김없이 체벌했다. 나와의 약속을 까마득히 잊은 채 말이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나의 약속 파기였다.
톨스토이가 백합꽃 수가 놓인 가방을 메고, 어느 시골을 여행하다 어떤 어머니와 어린 소녀를 만났다. 그 소녀는 톨스토이의 가방을 갖고 싶다며 어머니를 졸랐다. 톨스토이는 가방에 세면도구와 좋아하는 책 등이 들어있어 당장 소녀에게 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리하여 며칠 뒤 그곳에서 가방을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며칠 뒤 톨스토이는 약속대로 소녀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소녀는 갑작스런 병으로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톨스토이는 소녀의 무덤을 찾아가 소녀는 죽었지만 약속한 내 마음은 죽지 않았다며 무덤 앞에 있는 돌 십자가에 그 가방을 걸어 주었다. 어느 날 누군가 무덤의 돌 비석에 가방을 조각해 놓고 ‘프라우다’라는 비명(碑銘)을 새겨 놓았다. 이때부터 소녀의 무덤은 작은 명소가 되었다 한다. ‘프라우다’란 말은 러시아말로 양심, 진실, 약속이란 뜻이란다. 톨스토이는 하찮게 여길 수도 있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나는 지난 10월 3일 충남 홍성에 있는 홍주순교성지를 순례했다. 나는 순교 터인 홍주 옥사, 생매장터, 참수 터, 그리고 신앙을 증거 했던 동헌, 저자거리를 숙연한 마음으로 순례했다. 충청도의 첫 순교자인 61세의 원시정 베드로는 주리와 치도곤 등으로 살이 묻어나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고문을 가해도 죽지 않자 엄동설한 한밤중에 온 몸에 물 을 뿌려 동사(凍死)하게 했다. 30세인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16번의 문초를 받는 동안 곤장과 몽둥이 등으로 천 400대의 매를 맞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했지만 죽지 않았다. 결국은 새끼줄로 목을 졸라 죽임을 당했다. 두 순교자를 포함해 홍주에서만 212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순교자들은 참수, 교수, 옥사, 아사, 매질 등으로 죽어 갔다. 이들 순교자들이야말로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킨 사람이 아니겠는가. 갖은 회유와 협박, 고문에도 끝내 배교(背敎)하지 않고 목숨으로 신앙을 지킨 위대한 사람들이다. 내가 만약 그 시대에 살았다면 나는 과연 어찌했을까?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포교할 때 조선사회의 조상숭배사상을 이해했더라면 선교방법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와 박해가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죄인으로 몰려 순교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장 나이 많은 순교자는 84세의 남상교 아우그스티노이고,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10살밖에 안 되었던 김춘겸의 딸이었다. 참으로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약속은 신뢰에서부터 출발한다. 신뢰가 무너지면 약속도 깨지고 만다. 약속은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다. 지금 금융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시장신뢰상실 탓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은 탓에 국민은 정부의 약속을 믿지 못한다. 경제위기 탈출은 정부의 신뢰회복이 우선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쉽게 약속하고 쉽게 그 약속을 어긴다. 나와의 약속이든 상대방과의 약속이든 약속은 지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약속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잇듯, 나는 담배를 끊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으려 한다.
(2008.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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