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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노래/김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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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675회 작성일 12-08-24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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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노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전주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학철 오늘은 어버이날,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난다. 나는 안골 뒷산에 모신 조상님들의 산소를 찾았다. 그 산소 위편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소, 바로 그 아래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묘소가 있다. 증조부모님 묘소는 무주군 당산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친형들은 물론 사촌형들까지 모두 추석 무렵 벌초를 했는데 그간 형들이 작고하거나 서울 등 외지로 떠나니 13년 전부터 막내인 내가 내 아들과 함께 벌초와 성묘를 하고 있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얼굴을 뵌 적이 없다. 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 때 62세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가신지도 어느덧 47년이 흘렀다. 300평 됨직한 이곳 선산에는 지난해 추석 때 벌초를 해서인지 아직 잡초는 없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무주였다. 가난하게 살던 그 시절 18세의 총각인 할아버지는 땔감을 마련하려고 인근 야산에 가서 잡목을 베던 중 이웃동네 사람의 신고로 당시 일본순사한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나흘이나 문전걸식하며 곰티재를 거쳐 걸어온 곳이 이곳 전주 인후동이었다. 의탁할 곳이 없어 당시 부농(富農)인 제주고씨 집 머슴살이를 하며 약 7년간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좋아 농사일을 잘했고 또 성실하여 고씨집안 어른의 눈에 들어 마침내 자기 딸과 혼인을 시키고 7년간의 새경과 더불어 논 11마지기, 밭 12마지기 정도를 받아 분가를 했다 한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버지는 그 중 장남이셨다.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를 빼닮아 6척 거구로 힘도 좋으셨다. 머리는 짧은 상고머리이고 코와 귀와 입은 큰 편이며 광대뼈가 나오고 두 눈도 크고 눈빛은 빛나며 목소리는 굵었다. 40대 후반부터는 턱수염을 길러 흡사 옛날 장수의 상호를 닮았다. 어렸을 때 나는 이러한 아버지 앞에 감히 범접(犯接)도 못하고 늘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이른 새벽이면 꼭 사립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새벽에 대문을 열어 놔야 복이 들어온다고 말씀하셨다. 새벽에 일어나신 어머니도 부엌에 가셔서 맑은 샘물을 한 그릇 떠놓고 두 손을 모은 채 조왕신(竈王神)께 집안의 행운을 비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둘째 가라면 서운할 정도로 부지런하셨다. 오로지 농사일밖에 모르셨다. 모든 작물은 반드시 제 철에 파종하고 또 제 철에 수확하셨다. 논에 나는 피 한 포기 밭에 나는 풀 한 포기라도 그대로 두는 법이 없었다. 비오는 날에도 어김없이 밀짚모자에 도롱이를 둘러쓰고 논밭을 한 바뀌 돌아야 했다. 가뭄이 계속되어 논에 물이 말라 쩍쩍 갈라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애가 타서 어쩔 줄 모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동네에서 일 잘하고 부지런한 사람을 좋아하신 반면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사람은 미워하셨다. 가끔 아버지는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나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부지런하면 가려운데도 안 긁고 사는 법이다.” 이는 무학이신 아버지께서 자식들에게 던져주시는 근면정신을 깨우쳐 주는 첫 번째 가르침이었다. 또 아버지는 멀리 집밖에 나가 오줌이 마려워도 참았다가 반드시 집에 와서 눈다고 하셨다. 그 시절에는 비료가 귀하여 밭농사든 논농사든 인분(人糞)과 오줌 그리고 가축의 배설물을 숙성발효시켜 비료대용으로 사용해서 농사가 아주 잘되었다. 시장에서도 ‘안골채소’라고 하면 알아주었다. 가을이 되면 항상 풍성한 수확을 했는데 추수한 벼는 약 30가마를 사랑채와 창고에 가득 쌓아 놓고 쌀이 떨어질 만하면 도정을 해다 먹었다. 보리와 감자, 고구마, 건고추 등을 포대에 담아 창고에 쌓아 두고 사용하였다. 또 겨울철 새벽이면 동네 앞 큰길로 나가 소양에서 삭정이를 싣고 오는 마차를 기다렸다가 5대정도 분량을 구입하여 마당에 가득 쌓아 놓고 땔감으로 사용하셨다. 아버지는 여섯 남매가 배부르고 등 다숩게 살게 하는 것을 지상철학으로 생각하셨다. 이웃사람들은 우리 집을 촌부자로 알았다. 나 역시 남들은 ‘보릿고개’니 ‘춘궁기’니 하지만 내 귀에는 항상 다른 나라 이야기로만 들렸다. 우리 집은 종손집이라 그런지 양 명절은 물론 할아버지와 할머니 제사를 반드시 지냈다. 제사 전날 아버지는 장에 가셔서 쇠고기와 돼지고기, 명태, 홍어, 상어 등을 사서 지게에 가득 지고 오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 오신 육물과 생선 그리고 집에서 기른 파와 당근, 애호박, 고구마, 풋고추 등으로 각종 전을 부치셨다. 이윽고 밤이 되면 친척들과 같이 음식을 안방에 가득 차려 놓고 제사를 지냈다. 이때다. 동네사랑방에서 놀던 주민 7~8명은 꼬마를 시켜 ‘단자’를 우리 집으로 보냈다. 그 ‘단자’란 백지에 커다란 새 한 마리를 그려 놓고 그 아래에 ‘먹새’ 라고 써놓은 종이를 말한다. 이것을 받아 본 아버지는 각종 전을 한 접시씩 수북이 담아 막걸리 두어 병과 함께 보냈다. 당시에는 제사음식이나 생일 떡, 돌떡 등 먹을거리가 생기면 이웃끼리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우리 집에서는 제사 지낸 다음날 으레 동네 25가구에게 제사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배달은 으레 내 몫이었다. 아버지는 음식은 콩 한 쪽이라도 동네사람들과 나눠 먹어야 하늘에서 복을 받는다고 하셨다. 어느 날 술이 거나해진 아버지가 굴비 한 두릅을 갖고 오셨다. 어머니는 그 굴비를 장에서 사 오신 걸로 알고 얼마 주었냐고 물어보셨다. “오늘 참 별일 다 봤네. 아니 글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그 최 영감이 자꾸 막걸리를 한 잔 대접하겠다고 내 옷소매를 잡아끌기에 따라 갔더니 최 영감이 그동안 일은 다 자기 잘못이었다며 사과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막걸리를 다 마시고 나오려니까 장에서 굴비 두 두릅을 사왔는데 그중 한 두릅은 형님한테 드릴 테니 잡수시라고 하여 할 수 없이 받아 가지고 왔네.참,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여!” 또 아버지는 지난 40대 때부터 50대 때까지 5일마다 열리는 진안장으로 장사를 다니셨다. 장꾼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에다 채소류와 건어물류 등을 싣고 가는데 새벽에 출발하면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 오셨다. 그런데 하루는 진안읍내에서 남편은 군대에 가고 젊은 부인만 홀로 남아 아이를 출산한 일이 있는데 워낙 가난해서 끓여먹을 양식조차 없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는 즉시 쌀 한 말과 미역 한 다발을 사서 그 산모에게 갖다 주었단다. 이 소식이 진안 장날 사람들한테 퍼지게 되어 진안읍내에서는 아버지를 가리켜 인심 좋은 전주 채소장수 영감이라 불렸단다. 그 뒤부터는 감기라도 걸려 진안 장에 못 갈 경우 진안읍내 사람들은 왜 전주영감이 오늘 장날엔 안 보인다라며 궁금해 하더라고 했다. 삼복더위 어느 여름날, 아버지는 갓 길어온 샘물로 등목을 하려고 웃옷을 벗었을 때였다. 윗도리를 벗은 아버지의 두 어깨에는 푸르스름한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한평생 우리 6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지게를 지어서 피멍이 든 게 분명했다. 어린 마음에도 마음이 찡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동네 애들과 소양 만덕산에서 따온 감 1포대를 보신 아버지는 아무리 산에 있는 감나무라도 전부 다 임자가 있는 법이라며 앞으로 그런 짓은 절대 하지 말라고 나무라셨다. 또 자기 자신도 어렵게 사는 처지인데도 이혼하고 아들딸 남매를 데리고 온 자기 여동생을 따뜻이 맞아 의좋게 살고 있는 동네사람 소형식 씨에게 “형식이, 고맙네. 정말 고마워.” 하면서 무슨 큰 덕이나 입었던 사람처럼 여러 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다 키워 성돈이 된 돼지가 팔려 나갈 때 “죽어서는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라!” 하시며 돼지를 실은 화물자전거가 사라질 때까지 처연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일도 생각난다. 아버지는 동네어른한테 깍듯이 예의를 지키셨다. 열 살 정도 위인 문 씨 어르신은 한문도 조금 알고 ‘합죽선’을 만드는 어른이셨는데 아버지께서는 문 씨 노인을 꼭 형님이라면서 가끔 주막에 모시고 가서 술을 대접해 드렸다. 또 같은 나이 또래거나 연하인 사람한테도 가끔 술을 사주는 관계로 동네사람들은 술 인심이 좋은 아버지를 잘 따랐다. 설 명절 때는 동년배의 사람부터 연하의 청년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께 세배를 오는 사람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우리 집에서는 설 전날 아예 막걸리를 5말 정도 주문하여 부엌의 땅속에 묻어둔 도가니에 부어 놓고 삼삼오오 세배를 오는 동네사람들에게 이 술을 대접하곤 했었다. 또 정월보름이면 이웃동네 농악패가 우리 집 마당에서 신명나게 몇 바퀴 돌고 잠시 쉴 때면 술을 걸판지게 마시게 내놓았다. 그러고 나서는 또 뒤란에 있는 장독대를 중심으로 또 몇 바퀴 돌아 집안의 행운을 빌고 잡귀를 쫓아내며 가을에는 풍년이 들라고 굿을 울려주었다. 이때는 동네어르신부터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구경꾼이 우리 집 마당에 꽉 찼다. 아버지는 쌀 한 말과 막걸리 두 말을 농악놀이패에게 내놓아 이들의 노고에 보답했다. 또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아버지는 “하하, 좋다 좋아!” 하시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셨다. 이렇게 기분 좋은 날 아버지는 꼭 부르는 노래가 하나 있었다. 그 노래는 이렇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 하늘엔 별들도 많고 이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 가 그것이다. 왜 많은 노래 중에서 하필 이 노래인가, 젊어서부터 쉬지 않고 농사만 짓노라 놀 시간이 없었던 게 50대가 넘어 생각하니 후회가 되고 한이 맺혀서 나오는 노래인가! 아니면 그냥 노래니까 흥에 겨워 부르시는 노래일까! 그러나 아버지가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술을 드시고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부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는 환갑을 맞아 집에서 큰잔치를 열었다. 온 동네사람들 은 물론 이웃동네 사람들까지도 모두 모여 밤낮 가리지 않고 사흘잔치를 했었다. 동네사람들은 흥에 겨워 잘 놀고 노래도 부르면서 아버지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그러나 어쩌랴, 환갑 진갑을 넘기시고 지병이셨던 해소(천식)가 악화되어 양방, 한방 다 써봤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형들은 논밭을 팔아서라도 병원에 입원하실 것을 권유드렸건만 아버지는 논밭을 파는 것을 끝내 거부하시고 마침내 62세에 숨을 거두셨다. 부음소식을 들은 우리 동네 사람들은 물론 이웃동네사람들까지 모두 몰려와 조문을 하였다. 마침내 출상하는 날, 동네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상여 메기를 자청했다. 이윽고 집에서 떠나시던 날 온 동네사람들은 모두 몰려 나와 마지막 가시는 아버지를 전송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있던 나는 “추석 때 벌초하러 오겠습니다. 그간 평안히 계십시오.”라고 인사를 하고 묘소에서 내려왔다. 내 나이 어느 덧 68세, 나이가 먹을수록 4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아침에는 내가 약을 먹었든가 안 먹었든가, 또 집 문을 잠갔든가 안 잠갔든가 헷갈리다가도 이렇게 40~60년 전 일은 오히려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더욱 그리워진다. 그런데 골짜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생전에 애창하시던 바로 그 노래였다. “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 ” (2012.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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