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에는/김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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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에는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현 준
우리는 조금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남들의 잘난 행동을 보고 들을 때, 칭찬을 하기에 앞서 '누군 왕년에 뭐 안 해본 놈 있나?'고 빈정댄다. 지금은 지난 일이지만 자존심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표현은 외국에는 별로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왕년을 거론하는 사람치고 현재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경우가 많다.
어떤 친구는 왕년에 시내 Y동에서 전봇대 2개 구역을 주름 잡았다고 흰소리를 하였다. 그의 왕년은 고교시절이다. 그러면 나는 왕년에 만주를 주름잡던 시절이 있었다고 뻥을 쳤다. 백마를 타고 태산준령을 넘었다고도 하였다.
왕년에 공사판 십장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강 노인은 젊은 시절 주먹 좀 썼다고 하였다. 힘이 장사여서 씨름판을 다 쓸었고 황소를 십 여 마리나 탔다고 자랑했다. 믿거나 말거나인 일이다.
대학총장을 오래 지냈던 어떤 분은 퇴직한 뒤 혼자 자동차 문을 열고 닫지를 못했다. 민원서류를 어떻게 떼는 줄을 몰라 쩔쩔매기도 했다. 비서실장으로 일했던 왕년의 아랫사람에게 부탁하여 일을 처리했다. 왕년에 정부 고관이나 국회의원을 지냈던 사람들은 세상이 변하고 왕년만 남게 되면 속이 뒤집힐 것이다.
퇴직한 어느 지인이 '손을 봐 줄 사람이 있다'고 열을 내는 것을 보고, 전직 고위 관료가 영어의 몸이 되어 손봐줄 놈이 몇 명이라고 떠들던 일이 생각났다.
젊은 날 학교에 근무하던 때였다. C선생은 언사가 좋았다. 사소한 일이라도 침소봉대하여 게거품을 물고 떠들어대면 안 넘어갈 사람이 없었다. 1980년대 초에는 월남전 이야기가 술안주로는 최고였다. 나는 참전을 안 했지만 전우신문이나 귀국한 병사들을 통하여 월남 이야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C선생이 월남을 화제로 말을 꺼내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사이공 거리, 붕타우 해안, 안케패스 전투 등 막힘이 없었다. 우리는 수고했다며 술잔을 거듭 채워주었다.
C선생의 왕년 무대는 월남 정글이었다. 그런데 몇 년 뒤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C선생은 현역으로 입대한 적이 없었고, 늦은 나이에 방위근무를 마쳤다는 것이다. 왕년 위조죄는 처벌을 받지 않는 줄 알았던가?
제자 김성만은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외항선 2등 항해사로 배를 탔다. 20년이 지나 꿈에 그리던 선장이 되었다. 그는 5대양을 주름잡고 다닌 바다의 사나이였다. 귀국하면 날 찾아와 보고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각국의 지폐, 동전 그리고 우표를 모아다 주었다. 김 선장이 C선생만큼이나 말 재주가 좋았더라면 나는 화폐나 우표보다도 더 값진 수필의 소재를 많이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그래도 퇴역하면 왕년 마도로스 김의 영웅담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를 한다.
남들에게 내놓을 만한 나의 빛나는 왕년은 언제일까? 푸른 초원에서 소를 몰던 초동시절일까. 호주머니는 비었어도 머리는 꽉 찬 것 같던 대학생 시절일까. 천군만마를 호령하듯 호기로웠던 소대장 시절일까. 아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애하던 5년의 세월일까. 아니, 교장으로 재직하던 8년의 기간일까.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다. 10년 뒤에는 오늘을 빛나던 왕년이라고 기억하지 말란 법이 없다. 오늘도 소중한 왕년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사람은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 전성기가 바로 쇠퇴기에 접어들 때인 것이다. 오늘도 수사기관에 불려가 지은 잘못을 자복하는 왕년의 실력자들이 신문지면을 어지럽히고 있다. 불을 쫒아 목숨을 하릴없이 버리는 불나방 같은 인생들이다.
지나간 세월에 침묵하며 왕년을 들먹이지 않는 사람이고 싶은데, 간혹 그 놈의 입방정이 문제이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2012.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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