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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친일인명사전/강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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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두루미
댓글 0건 조회 629회 작성일 12-04-17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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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친일인명사전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강우택 수년 전 한국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 인명사전을 발간할 때의 일이다. 일제 강점기 친일인사의 선정을 놓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기도 하던 때였다. 나는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 한 사람과 만나 우리 아버지의 일제 때 관직생활과 친일인명사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일제치하에서 군수 직을 포함한 일정관직 이상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요건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제 말 선친께서 군수를 지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친일인명사전 때문에 내가 갑자기 친일파 후손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여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지 60여년이 지난 지금 또 돌아가신지 수십 년이 된 선친의 이름을 이 명예스럽지 못한 사전에 올려놓고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선친의 유품 두 개를 간직하고 있다. 선친의 일본유학시절의 졸업증서와 당시 한인유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찍은 검은 흑백사진 한 장이다. 이 증서에 동경상과대학장 岡 田 勳 소화 2년[1925]으로 명기되어 있는 증서다. 증서의 내용으로 보아 선친의 일본유학시절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1923년 진도 8.9의 대 강진은 순식간에 동경, 가와가나현, 지바현 일대를 쑥밭으로 만들어버렸다. 또 한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고 다닌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죄 없는 한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지진이기도 하다. 일인들은 손에 온갖 흉기를 들고 선친이 묵고 있는 하숙집에 들어와 일인 집주인에게 조선청년을 내놓으라며 윽박질렀다. 그러나 그 청년은 내 아들이라며 막아주어 하숙집 다락방에 숨어서 목숨을 건지기도 하셨다고 한다. 또 당시 동문수학한 고향이 진도인 허o수 어르신도 일인들에게 붙잡혀 죽음 직전까지 갔으나 향리의 한 유력한 일인 인사가 이 청년의 목숨만은 살려 주자고 극구 만류하여 목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폐허 이곳저곳에 한인들의 사체가 나뒹구는 참극 속에서 두 분은 살아남았고, 이런 연유로 생전에 두 분의 교분은 두터우셨다. 허o수 어른은 후일 자유당 정권 때 식산은행 두취[현 산업은행 총재}를 지내신 분으로 자유당정권이 정치자금으로 압력을 가하자 은행을 그만 두고 나온 일화를 남긴 유명한 분이기도 하다. 유학시절 선친께서는 오직 조선인이라는 일념 하나로 일인들과 경쟁하다 고질인 신경쇠약을 앓게 되셨고, 그 후유증으로 기차를 두려워하게 되어 생전에 기차 한 번 못타보시고 돌아가셨다. 당시 선친의 유학시절은 ‘2‧28동경유학생선언사건’이 있은 뒤 1920년대 일제가 한인유학생에 대한 핍박이 극에 달한 때이기도 하다. 당시 가난한 한인유학생들은 인력거를 끌며 학자금을 벌어서 썼다고 한다. 원래 인력거란 일본이 메이지시대에 발명하여 유럽에 소개한 교통수단의 하나로 1926년 서울에만 해도 인력거꾼이 4,7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인력거는 1인용과 2인용 두 종류가 있고 바퀴가 크고 끌대가 길수록 고급인력거라고 한다. 당시 고급인력거는 지금의 고급승용차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충북의 중농의 아들로 태어난 선친 역시 학비가 모자라 인력거를 끌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생전에 나의 어머님은 짙은 화장 한 번 못하셨다고 한다. 선친이 짙은 화장품냄새를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도쿄시내 번화가에서는 일본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은 게이샤[일본의 기녀}들이 인력거를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인력거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화장품냄새가 얼마나 역겨웠으면 생전에 어머님의 화장품냄새까지 싫어하셨을까 짐작이 간다. 또 당시에는 한인 인력거에 대한 일경들의 검문검색은 흔한 일이었으며, 그들에게 고분고분 순종하지 않으면 인력거를 빼앗아 일본 경시청에 압류하는 일도 많았다고 하니, 우리 한인유학생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도 없다. 선친께서는 요즈음 말로 인력거 아르바이트를 한 셈이다. 귀국 후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선친에게 평양은행 지점장을 제수하였으나 이를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셔서 여러 해 동안 농사를 지으셨다. 일제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었으리라. 선친께서는 나의 어머님을 만나 전주에서 가정을 이루신 뒤 전주부청{전주사펑}의 말단 관리로 일제의 관직에 발을 내딛으셨는데 그것도 일인들의 질시와 천대 속에서 시작한 일제관직생활이었다. 선친은 일제 때 나날의 울분을 술로 달래셨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도 선친의 학벌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어렸을 적에 나무로 된 그릇과 수저로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동네 구장이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놋쇠로 된 물건들을 다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지난날 이런 일들은 친일이 아니고 반일이란 말인가? 우리 민족이 일제 강점기에 살아남기 위해 최소한 일제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최근 한국민족문제연구소가 내놓은 친일인명사전의 방대한 자료를 보고 놀랐다. 일제강점기 동안에 우리 민족에게 부끄러움을 남긴 친일인사 4,776명에 대한 친일행적을 낱낱이 기록한 세 권의 책이 있었다. 지난날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일들이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에는 나치에 협력했던 부쉬정권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는 부쉬정권에 적극 협력하였던 사람들을 색출하여 곧바로 처단하였으니,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다. 선친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 실리지 않았다. 적극적인 친일흔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친에 대한 불효를 면하여 안도하였다. 그러나 한 편 불행한 시대에 불행하게 사신 아버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2012.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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