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간의 우애/송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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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간의 우애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송 일 섭
큰어머님은 임실군 성수면 양지리 석현마을에서 시집을 오셨다. 그래서 택호를 임실댁이라고 불렀다. 옛날이라 많이 배우시지는 않았으나 머리가 남달리 영리하시고 예쁘셨으며, 말을 위트 있게 잘하여 변호사라는 별명을 얻으셨다.
우리를 보면 항상 웃는 낯으로 유머를 잘하셨다. 어려운 시절에 5남 5녀를 키우다 보니 변변히 가르치지도 못하셨다. 김제에서 오래오래 사시다가 빚에 눌려 가산을 정리하고, 그리운 고향을 떠나 서울 노량진 산꼭대기로 이사를 하셨다.
방 하나에서 온 식구들이 기거하였다. 그때가 60년대 말이었다. 자녀들이 공장에 다니면서 근근이 사셨다. 그런데 의문이 있었다. 큰어머님 오빠가 군산에서 검사로 근무하다가, 경북 상주로 옮겨 가셨다. 윤보선 전 대통령 시절 국회의원을 지내고, 상주에서 변호사를 개업한 성공한 오빠가 계셨다.
큰어머님이 힘들게 사셔서 오빠의 도움을 받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런데 아무 도움을 받지 못했다며 웃으셨다. 그래서 거듭 친오빠가 맞느냐고 물으니 친오빠라고 하셨다. 큰어머님은 농촌 다른 아낙네와 달리 오빠를 자랑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전혀 도움을 받으려는 기색이 없었다. 큰어머님의 자녀들도 변호사이신 외삼촌의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가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신세를 지지 않고 살아가려고 애를 쓰셨다.
큰어머님의 친정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오누이간에 베풀며 살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물질적으로 도와주지 못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 있다 해도, 마음을 다독거려 줬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사람의 능력은 한이 없다. 한 사람이 몇 만 명을 먹여 살리는 분도 있는데, 성공하였다면 몇 안 되는 형제자매를 도와줄 수도 있지 않을까? 변호사라는 직업은 누구나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여의도로 자리를 옮겨 90세가 넘도록 변호사로 일하신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변호사의 생애가 궁금하였다. 임실 고향에 어떤 도움을 주고 사셨는지 궁금하여 큰어머님 자녀들에게 물어 봤으나 모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며느리를 얻고 보니 우연히도 그 변호사님과 앞뒷집이 아닌가. 작년에 사돈과 용담댐으로 놀러가려고 사돈댁에 들렀다. 변호사님이 고향에 남긴 것이 없는지 알아볼 좋은 기회였다. 동네 앞 어귀에 비석을 남겨놨다고 하셨다. 비석의 내용은 88올림픽 때, 이 마을 청년이 육상선수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내용이었다. 돌의 길이는 1.5m 정도의 예쁜 자연석이었다. 그 돌을 냇가에서 옮겨와 비석을 만들었는데, 그 비용을 변호사님이 부담했다고 새겨져 있었다. 또 하신 일이 무엇인지 물으니 변호사님 회갑 때 경북 상주로 초대되어 동네 어른들이 잘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현재 임실 본가에는 변호사 동생이 사는데 산골 집에서 두 노인만 연금을 받고 산다고 한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 하지 않던가. 변호사님은 여동생인 큰어머님을 왜 남 보듯 하셨을까? 사람은 스스로 일어서야 하기에 일부러 모른 척했거나 여자는 출가외인이기 때문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큰어머님은 노량진시장에서 버려진 배추를 주어다 김치를 담그고 사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당시 오빠 되는 분은 널리 이름이 알려져, 말만 들으면 다 아는 훌륭한 변호사였다. 큰어머님은 20여 년 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혈육! 이 얼마나 위대한 말인가!
나는 누님 한 분과 동생 넷이 있는데 서울과 부산에서 산다. 두 동생은 나보다 못산다. 나는 교사로 퇴직하여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다행인데, 못사는 동생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 1년 전 동생이 자동차를 사는데 500만원이 부족하다고 하여 보내주기도 하였다. 또 다른 동생은 사업자금 1,500만 원이 모자란다고 하여 보내 주었다. 작년에는 누님의 며느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서 100만원을 주며 모자란 장례비를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하였다. 금년1월에는 쌀을 사서 동생들에게 2가마를 보냈다. 얼마 전 혼인식장에서 동생을 만나 봉투 하나를 슬쩍 건넸다. 동생은 한사코 사양했으나 형제간의 정이니 받으라고 했다.
동생들에게 나와 아내는 부모님의 유산을 상속받지 않겠다고 했다. 형제들에게 애로 사항은 없는지 가끔 전화로 확인을 한다. 어렸을 적 똑같은 어머니 젖을 먹고 큰 게 형제가 아니던가.
(2012.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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